신후재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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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신후재를 그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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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신후재를 그린 초상화.
개설

198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규정영당(葵亭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이 초상화의 도상은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초상화와 크게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령(團領: 깃이 둥근 공복)과 사모관대 차림에 반우향의 의자에 앉은 초상이다. 바닥은 채전(彩氈: 카펫)을 깔지 않은 빈 공간으로 남겼고, 단아한 곡교의(曲交椅: 용의 무늬를 새긴 의자) 대신 조각 장식이 화려한 방형(方形)의 부수의(扶手椅)에 호피(虎皮)를 깔고 앉았다.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 잡음)하지 않고 두 손을 밖으로 노출한 채 흰색 상아홀을 들고 읍(揖)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통상의 예와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장황형식이나 채색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가 아닌 조선말기에서 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지방화사 내지 불화승으로 추정된다.

내용

세부 도상과 표현에 있어서 오사모(烏紗帽) 모정(帽頂)의 한 변을 직선으로 끊어서 표현한 것이나 날개에 아무런 문양도 표현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단령의 소매 부분과 발을 덮은 치마 부분에 안감과 중의(中衣)가 많이 보이도록 묘사하고 옷고름까지 밖으로 드러낸 것, 삽금대(鈒金帶: 황금 띠돈을 단 허리띠)를 가슴 부분까지 올려 차서 언뜻 잘 보이지 않게 묘사한 점 등이 특징이다. 또한 두 발을 흔히 팔자(八字) 형태로 벌린 채 앉은 다음 목화(木靴)의 등과 바닥을 단순하게 이분(二分)하여 칠했던 것과 달리, 두 발을 반우향으로 평행하게 벌리고 목화의 등과 목 부분의 입체적인 구조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점은 일반적인 초상화들과 다른 모습이다.

또한 조선시대 공신상이나 사대부상에 보이는 교의자의 형태보다 화려하고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고, 단령의 내의도 문양으로 채워져 있어 보다 정식적인 면을 띠고 있다. 게다가 발받침대로부터 의자가 밖으로 벗어나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보인 정교한 표현에서 멀어져 있다.

이런 특징들은 대체로 중국 초상화들에서 나타나는데, 신후재가 1689년(숙종 15)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중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려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다만 현전하는 이 초상화는 좁은 비단을 오른쪽 삼분의 일 지점에서 결봉하여 사용한 점, 단령에 세부 장식이 번다한 운문(雲文)을 묘사한 점, 그리고 전반적으로 화법이나 풍격에서 단아하고 정갈하며 해정한 맛을 보여 주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중국에서 그려온 중국 초상화는 아니고 조선에서 다시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비단 끝의 가장자리를 따라 네 변 모두 가는 먹선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이 테두리의 안쪽은 약간 누렇게 물들여 테두리 밖 원래 비단의 밝은 색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바로 이모(移模)하는 과정에서 중국 초상화의 원본 크기와 고격(古格)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하고자 했던 데서 나타난 특수한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얼굴의 용모가 성현도풍(聖賢圖風)으로 이상화되고 전형화되어 개성이 잘 표현되지 않은 점 또한 중국에서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얼굴은 호분(胡粉)을 사용하여 기본색을 배채(背彩)한 위에 붉은색 필선으로 농담과 굵기의 변화를 주어가며 윤곽선과 주름선을 묘사하고, 선묘(線描) 주변의 오목한 부분을 담묵으로 가볍게 우린 다음 다시 붉은색을 맑게 선염(渲染: 바림)하되 딱딱하고 볼록하게 나온 이마와 미간, 양쪽 광대뼈 부분, 양쪽 눈두덩이 부분도 붉게 우려서 홍기(紅氣)를 주며 강조하는 복합적 명암법을 사용하였다.

눈동자는 먹선으로 동그란 원형을 선묘하고 내부를 담묵으로 칠한 뒤 농묵의 점을 찍어 눈동자를 표현했고, 눈동자 옆의 흰자위 부분은 흰색을 칠하되 양쪽 끝으로 가면서 흰색을 서서히 풀어 준 다음 양쪽 눈초리 끝에 약간의 홍기를 주며 마무리했다.

얼굴의 얽은 자국은 맑은 담묵으로 가볍게 표현했다. 수염은 매우 가는 농묵의 먹선으로 대단히 정교하게 선묘하였다. 수염의 터럭들이 평행선을 유지하는 경향이 많아 다소 형식화된 듯한 느낌이 있다. 얼굴에 배채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 배경 장식이 복잡하게 첨가된 단령의 운문 등으로 볼 때 이모 시기는 대략 18세기의 전반경일 가능성이 많다. 홀과 중의(中衣)에도 흰색과 연두색을 배채하고 심지어 단령의 청색 부분도 뒤에서 배채하는 등 배채법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모는 모정이 다소 높은 편이고 날개가 타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를 동일한 먹색으로 칠해 매우 평면적으로 처리하였지만, 사모 밑으로 비친 망건에는 올을 일일이 선묘하여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단령은 물기와 필세가 적당한 농묵의 먹선을 사용하여 매우 유연한 곡선을 주조로 삼으면서 옷주름의 구조적인 다양성을 꽤 충실히 잡은 편이다. 색상은 통상의 예와 달리 푸른색이며 석채에 물기를 다소 많이 주어 약간 담채하는 느낌으로 채색했기 때문에 거친 붓자국이 드러나고 물감이 불규칙하게 엉긴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목 부분에 내비친 중의(中衣)의 깃은 주름선을 충실히 잡아 다소 정교한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흉배는 검은색 바탕에 상부에는 적황녹청(赤黃綠靑)의 채운(彩雲)과 붉은 해를 그리고 하부에는 암석과 파도를 그린 뒤 중앙 부분에 학 한 마리를 그린 단학흉배(單鶴胸背)이다. 붉은 해를 그린 것과 구름의 형태가 다소 화염문 같은 형태인 점은 통상적인 조선 중·후기의 흉배와 다른 모습이다. 관대와 흉배 및 목화(木靴)에는 금분과 은분을 사용하여 화려함과 고귀함을 강조하였다.

의자는 반우향으로 놓인 상태의 투시법을 보인다. 의답(椅踏)은 반좌향으로 놓인 반대 방향의 투시법을 보이고 있어 마치 의자가 바닥에서 들떠 있는 것 같은 모순을 보이고 있있다. 의답 자체도 강한 역원근법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형태가 심하게 왜곡되어 보인다.

비단은 결이 고운 편이며, 아교와 백반을 다소 많이 사용하여 화면이 약간 번질거리는 편이다.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소박하고 단아한 조선 족자의 원형도 잘 남아있다. 현재 1930년대에 모사한 별본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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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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