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찬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의 관직.
제도/관직
설치 시기
1420년(세종 2)|1478년(성종 9)|1506년(중종 반정 직후)
폐지 시기
1456년(세조 2)|1505년(연산군 11)
소속
집현전|홍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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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수찬은 조선시대에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의 관직이다. 경연, 실록 편찬, 왕명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을 전달하는 등 시종신으로서도 활동하였다. 성종 대에는 경차관으로 차정되거나 부정 적발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홍문관 설치 이후 홍문관이 언관화되어가며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의 관직.
설치 목적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이 설립될 때 집현전 내에 다양한 직제들을 마련해 업무를 담당하게 하면서 설치되었다.

임무와 직능

정원은 모두 2명인데, 이는 홍문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현전 설치 당시 집현전의 모든 관원들이 경연관(經筵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를 겸함에 따라, 경연 검토관 · 춘추관 기사관 · 지제교의 역할을 병행하였다. 즉, 경연에 참여하여 경전과 사서를 강의함은 물론, 사관으로서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을 제작하는 역할도 병행하였다.

또한 시종신으로서 왕명을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서적 편찬과 제도 정비 등에서 국왕의 고문에 응대하는 등 다양한 업무에서 왕을 보필하였다. 성종 대 홍문관으로 복설된 뒤에는 언론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됨에 따라 다양한 사안에서 홍문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시종신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어 경차관으로 차정되거나, 수령들의 부정 적발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변천사항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되며 폐지되었다. 이후 1471년(성종 2) 예문관에 옛 집현전의 직제들이 복구되면서 재설치되었다가 1478년(성종 9)에 홍문관이 복설되면서 온전하게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7월에 홍문관을 혁파한 뒤 진독청(進讀廳)으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1506년(연산군 12) 5월에는 진독관(進讀官)까지 폐지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 대 폐지된 관제들이 회복되면서 수찬직 역시 다시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
『성종실록』
『세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태조실록』
『태종실록』

단행본

최승희, 『조선초기 언론사연구』(지식산업사, 2004)

논문

최인기, 「조선초기 문원 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남지대, 『조선초기 중앙정치제도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남지대, 「조선 성종대의 대간 언론」(『한국사론』 1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5)
최승희, 「홍문록고」(『대구사학』 16, 대구사학회, 1978)
최승희, 「홍문관의 성립 경위」(『한국사연구』 5, 한국사연구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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