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과 홍문관의 모든 관원들은 경연관(經筵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의 직제를 겸하였다. 부응교 역시 경연 참여,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국왕의 명령을 하달받아 시행하는가 하면, 서적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사명(辭命)을 제작하는 예문관 응교직을 겸대하는 관직(응교, 부응교) 중 하나였으므로 문장에 능해야 하였다. 그 밖에도 국왕이 특정 안건을 수의(收議)에 부칠 때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의견을 개진하였다.
성종 대에는 시종신으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1474년(성종 5)에 외사고의 포쇄관 임무를 맡아 파견되는가 하면, 흉년이 들면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되었으며, 대마도 경차관으로도 차정되었다. 왕명으로 지방의 곤란한 사정을 살피고 수령의 불법을 적간하는 등 특별한 임무로서 국왕을 보필하였다. 아울러 성종 대 이후 홍문관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부응교 역시 홍문관들과 함께 국정 현안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이후 집현전의 기능을 예문관에 이관시켰다. 성종 즉위 직후, 옛 집현전 직제들이 예문관에 설치될 때 집현전 시절에는 없었던 부응교직이 신설되었고, 1478년(성종 9) 홍문관의 복설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1505년(연산군 11) 7월,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