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차관(敬差官)은 조선 초기인 1396년(태조 5)에 처음 등장한 외방 사신으로, 고려시대나 중국에서는 동일한 명칭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경차관은 중국에서 황제가 파견하는 사신을 '흠차관'이라고 지칭한 것에 상응하는 명칭이다. 제후격에 해당하는 조선에서 '흠차관'이라고 명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경할 ‘흠(欽)’ 자와 동의어인 공경할 ‘경(敬)’ 자를 택하여 경차관 제도를 만들었다. ‘경차(敬差)’에 왕이 보내는 사신의 의미가 있었으므로, 내관이 파견된 경우에는 '경차 내관(敬差內官)'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경차관은 당하 참상관이 파견되었기 때문에 당상관 사신과는 달리 다양한 실무 수행을 하였으며, 지방의 관찰사가 수행하는 임무를 보조하는 성격이 강하였다. 주로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파견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도 필요에 따라 종종 파견되었다.
조선 초기 경차관에 임명된 사람들은 당하 참상관이었다. 재상급 관료, 혹은 당상관이 외방 사신으로 파견될 때 ‘제사(諸使)’ 또는 '○○사(○○使)'의 칭호를 사용한 것에 상응하여 참상관 관원이 파견되는 경우 '경차관'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사(使)’라는 용어에 사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듯이, 사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경차’라는 용어와 ‘관(官)’을 합성하여 참상관 사신을 지칭하는 ‘경차관’을 등장시켰다. 주로 3품 이하의 참상관이 경차관으로 임명되었으므로, 2품 이상을 임용할 때 수점(受點)한 것과는 달리 구전으로 임명되었다.
경차관은 제사와 품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능에서는 제사와 엄격하게 다르지 않았다. 제사가 고위직으로서 보다 포괄적인 기능을 지닌 것에 비해, 참상관인 경차관은 보다 전문성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분되지 않고 왕 및 중앙 정부의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제사와 경차관을 보낼 수 있었다. 경차관은 원래 참상관 외방 사신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였기에, 종류와 기능은 매우 다양했다.
경차관이 등장하면서 제사와 별감의 종류가 줄어들고, 종전 제사와 별감이 담당하던 외방 사신의 일부 기능을 경차관이 담당하였다. 또한 경차관은 경우에 따라서 하나의 경차관이 두 가지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고, 사목(事目)을 지급 받아 종합적인 지방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경차관의 기능도 처음에는 방왜(防倭)나 군용점고(軍容點考)와 같은 군사적 성격이 강했으나, 정종 대에는 진제경차관 · 창고노비추고경차관 등이 파견되어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였고, 태종 대부터는 국방 · 외교상의 업무, 재정 · 산업상의 업무, 진제 · 구황의 업무, 옥사 · 추쇄(推刷)의 업무 등으로 임무가 대폭 늘어났다. 명칭에 있어서도 ‘손실경차관’ · ‘양전경차관’ · ‘군용점고경차관’ · ‘추고경차관’ · ‘야인압송경차관(野人押送敬差官)’ · ‘만산군추쇄경차관(漫散軍推刷敬差官)’ · ‘유지경차관(宥旨敬差官)’ · ‘감전경차관(監戰敬差官)’ · ‘진제점고경차관(賑濟點考敬差官)’ · ‘문민질고경차관’ · ‘기민진휼경차관(飢民賑恤敬差官)’ · ‘축성점고경차관(築城點考敬差官)’ · ‘금란경차관’ · ‘점마경차관’ 등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경차관의 명칭은 기능에 따른 명칭 외에 ‘제주도경차관(濟州道敬差官)’ ·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 등과 같이 파견된 지역을 기준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손실경차관은 1403년(태종 3)부터 파견되기 시작하여, 흉년이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해마다 파견되는 것이 일반화되어 『경제육전(經濟六典)』 원전에 실리게 되었다. 1421년(세종 3)부터는 왕에게 계문(啓聞)하는 것까지 없애고, 호조에서 이조에 이문(移聞)하여 발견(發遣)하기 시작하였다. 파견 시기는 매년 수확기인 7월 15일에서 9월 15일 사이였고, 파견 인원은 대체로 한 도(道)에 2~3명이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도마다 1명만 보내기도 하였다.
군용점고경차관은 1404년(태종 4)에 처음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1418년(세종 즉위)에 이르면서 매년 농한기인 가을에 파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흉년에는 흔히 파견을 연기하였다.
양전경차관은 1405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했는데, 농한기를 택하여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보통 1만 결(結)당 1명이 파견되었으나, 이후에는 1405년에 45명, 1406년(태종 6)에 60명이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성종에 이르러서는 200여 명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노비추쇄경차관은 3년에 한 번씩 파견되었고, 마축목양경차관(馬畜牧羊敬差官)은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파견되었다.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이 시행되면서 해마다 전세(田稅) 산출 방법이 바뀌어 답험 손실에 의한 정률 수세(定率收稅)에서 연분9등(年分九等)과 전분6등(田分六等)에 의한 정액 수세(定額收稅)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공법이 적용되는 지역에는 손실경차관 대신에 연분경차관(年分敬差官)이나 재상경차관을 파견하였다. 이 조치는 1471년(성종 2)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법제화되었다가 1760년(영조 36)에 혁파되었다. 한편, 연분경차관과 재상경차관은 그 역할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연분경차관은 담당 지역의 작황을 전체적으로 조사하여 최종적인 판정을 내리는 임무를 담당한 반면에, 재상경차관은 재상전(災傷田)으로 신고된 토지에 대해서만 조사하여 판정을 내렸다.
1396년 경차관이 등장하면서부터 외방 사신의 파견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경차관은 중국이나 고려시대에는 확인되지 않고, 조선 왕조에만 있었던 관직이다. 조선 왕조가 군현제 개편 및 외관제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적 성격을 강화하고, 동시에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다양한 외방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그 가운데 경차관은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