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법(貢法)은 1444년(세종 26)에 시행된 조선 전기의 전세제도로서 전분6등과 연분9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고려 말에 제정한 과전법을 기반으로, 공전과 사전을 막론하고 1/10의 세율을, 답험손실을 통해 차등 적용해 수취했다. 그러나 상등전에서 최대 30두를 수취하는 방식은 당대 농업 생산력을 반영한 것이 아닌 데다가 풍흉을 고려해 세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령과 위관, 경차관의 농간이 야기됐다. 이에 세종 초 토지 전품을 6등급으로 나눠, 풍흉에 따라 매년 9등급으로 세율을 차등 적용해 수취하는 공법이 시행됐다.
조선 초의 전세제도는 과전법(科田法)하에서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막론하고 1/10의 세율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에 최대 30두를 기준으로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 매년 토지의 작황을 조사해 손실에 따라 전세를 줄여 주던 제도)을 통해 세율을 차등 적용해 조세를 수취했다.
당시 양전제(量田制)는 삼등전품제(三等田品制)를 원칙으로 했으나 현실은 대부분 하등전(下等田)으로 분류되어 세수 확보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또 최대 300두를 생산하는 토지에서 풍흉에 따른 손실이 없을 경우 최대 30두를 거두는 수취율 역시 당대 향상된 농업 생산력을 반영하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손실답험법은 답험의 주체인 수령과 위관(委官), 경차관 등이 농간을 부려 손실의 비율을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공법(貢法)은 이러한 손실답험의 폐단을 개선하는 한편, 당대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고, 객관적 기준에 의거해 전세 수취율을 조정하고자 한 개혁안이었다.
세종 초에 공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1430년(세종 12) 정부 관료부터 하층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어 1436년(세종 18)에는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공법의 구체적인 안을 짜고 1444년(세종 26) 마침내 공법 실시를 위한 최종안을 마련했다.
공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전적(田積)은 종래 3등전에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으로 마련하며, 양전척(量田尺)도 종래의 수등이척지척(隨等異尺指尺)에서 새로운 수등이척주척(隨等異尺周尺)으로 개정했다.
② 세액(稅額)은 1/20세(稅)로 세율을 조정하며,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의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른 정액세(定額稅)로 개정했다.
③ 모든 토지는 양안(量案)에 정전(正田)과 속전(續田)으로 구분하되 정전 내 진황전(陳荒田)은 면세하지 않으며, 재상전(災傷田)은 감면하되 상접(相接)한 전지가 10결(뒤에 5결로 조정됨) 이상이라야 하였다.
공법은 처음에는 절대 면적에 따라 생산량을 파악하는 경묘법으로 기획되었으나 논의 과정에서 생산량에 기초해 토지를 파악하는 결부법을 적용해 전분6등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공법은 새로 실시한 양전(量田)과 함께 시행되었다. 공법은 1444년(세종 26) 하삼도 6현(六縣)에서 먼저 시행되었고, 1450년 전라도, 1461년(세조 7) 경기도, 이듬해 충청도, 그 다음 해 경상도, 1471년(성종 2) 황해도, 1475년 강원도, 1486년 평안도, 1489년 영안도의 순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공법 시행 이후 양전(量田)‧연분등제(年分等第)‧급재(給災)‧진전수세(陳田收稅)에 대한 권한이 지방관에게 부여됨에 따라, 풍흉에 따른 세율 적용과 면세지 설정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호강(豪強)한 세력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16세기부터는 지주 전호제의 발달로 전세 수취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연분 9등의 적용이 하지중 혹은 하지하에 해당하는 4~6두로 고착되었다. 1635년(인조 13)에 시행된 영정법은 이처럼 공법이 변질되어 민간에 타협적으로 적용되던 방식을 정부가 승인한 제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