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에서는 논은 1결마다 조미(糙米) 30두, 밭은 1결마다 잡곡 30두를 거두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액수를 매해 그대로 거두지 않고 해마다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직접 조사하여 농사의 손(損)과 실(實)의 비율에 따라 세액을 감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세의 수취 제도를 답험손실법이라고 하였다.
과전법과 동시에 제정된 답험손실법의 규정에 따르면, 농경지마다 작황을 10등분의 비율로 나누고 손실(損失)이 10%이면 10%의 조(租)를 감면하고, 손실이 20%이면 20%의 조를 감면하여 가다가 손실이 80%에 이르면 조를 전부 면제하도록 하였다. 답험의 방식은 공전(公田)의 경우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관원을 보내 다시 심사하도록 하였고, 사전(私田)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관리가 스스로 심사하도록 하였다.
고려 말에 마련된 답험손실법은 조선 건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변화하였다. 우선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에 이르러 손실 규정을 일부 수정하였는데, 손실이 20% 이하인 경우에는 조의 감면을 인정하지 않고 30두의 전세를 모두 납부하도록 하였다.
답험손실법은 태종 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때 개정된 내용이 세종 대 공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전세 수취의 기본을 이루었다. 태종 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이전의 제도가 피해를 입은 농민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 답험을 하는 방식이었으나 대신에 국가가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에 대해 손실을 조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농민의 요청과 무관하게 모든 토지에 대한 답험을 실시하게 되면서 수령의 업무가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수령을 독려하기 위해서 답험 실무를 감독하는 손실 경차관을 파견하였다. 나아가 답험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수령과 경차관의 기능을 축소하고, 수령을 대신해서 답험을 전담하는 관원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영을 변화시켰다.
이와 함께 손실 규정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 전세가 면제되었던 80% 이상의 손실에 대해서도 비율대로 3두 내지 6두를 납부하도록 하는 한편, 20% 미만의 손실에 대해서는 30두 전체를 그대로 납입하도록 하였던 것을 수정하여 비율대로 각각 24두, 27두를 각각 납입하도록 변경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1405년(태종 5)에 시작된 제도적인 변화를 가리켜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이라고 하였다.
태종 대에 답험손실법에 일어난 변화는 당시 새로 양전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생긴 토지 파악 방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는 양전이 함께 실시되었는데, 이전과는 달리 경작지와 미경작지를 모두 함께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는 큰 폭의 변화가 있었다. 토지 파악 방식의 변화는 30만 결 이상의 토지를 추가로 확보하는 성과로 이어졌으나, 이렇게 새로 양안에 등재된 토지에 그대로 전세를 부과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답험손실법 운영의 변화는 답험손실법의 적용 대상에서도 일어났다. 애초에는 공전에 대해서만 국가가 답험을 실시하고 사전은 전주 스스로 답험을 하도록 하였으나, 태종 대 이후에는 공전뿐만 아니라 사전에서도 국가가 일괄하여 조사하는 이른바 ‘관답험’이 추진되었다. 1415년(태종 15)에 시작한 관답험에 대한 논의는 전주들의 반발로 인해 여러 차례 논의와 시행 및 번복을 거듭한 끝에 1419년(세종 1)에 관답험으로 최종 결정되어 국가가 모든 토지를 직접 답험하는 방식이 정착하였다.
조선 초기의 전세 수취 제도인 답험손실법은 구체적인 농사의 작황을 직접 조사하고 이에 따라 전세액을 조정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 준다는 취지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루어지는 답험의 막대한 행정 부담과 답험을 맡은 관원들의 역량 미비와 부정으로 인한 폐단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세종 즉위 이후 매년 모든 토지에 일정한 세액을 부과하는 공법(貢法)이 추진되었으며, 답험손실법과 공법을 둘러싼 치열한 찬반의 논의 끝에 1444년(세종 26) 공법이 제정되면서 답험손실법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작황에 따라 세액을 조정하는 답험손실법의 특징은 정액세법인 공법에서도 해마다 9등급의 연분(年分)에 따라 세액에 차등을 두는 형태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