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구등법은 조선시대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세의 단위로 편성한 기준이다. 고려시대에 농경지의 작황을 파악하는 손실답험과 농사의 작황의 손실을 10분으로 구분하여 1분의 손해가 있을 때마다 조세를 감면해 주는 수손급손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답험의 실무와 손실의 집계가 자의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1444년에 전분육등법과 함께 공법전세제를 확정하였다. 일종의 정액세법으로 손실답험의 단위를 군현별로 정하고 농작에 따라 연분을 구분하였다. 점차 연분을 강등하여 보고하는 관행이 생기면서 하하(下下)의 단일 연분에 따라 1결당 4두로 전세가 고정되어 갔다.
1444년(세종 26)부터 실시한 조세 부과의 기준이다. 조선시대의 공법전세제(貢法田稅制)에서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지역 단위로 수세하던 법으로, 일종의 정액세법(定額稅法)이다.
고려의 전시과(田柴科) 체제에서는 농경지의 휴한(休閑) 빈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상 · 중 · 하의 3등급으로 나누었다. 각 농경지의 작황을 파악하는 손실답험(損實踏驗)은 현지의 유력자인 촌전(村典)이 일차로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호부(戶部)에게 호부는 삼사(三司)에게 보고했으며, 다시 중앙의 지시로 관원을 파견하여 재심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고려 후기에 휴한농법(休閑農法)이 연작농법(連作農法)으로 널리 변천하면서 전품의 등급을 파악하는 방법이 휴한의 빈도가 아닌 농경지의 비척(肥瘠)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기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에서는 3등전품제를 운용하되, 수손급손(隨損給損)의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수손급손은 농사의 작황에 손실이 전혀 없을 때를 10분(分)으로 하여 1결(結)당 최고 30두(斗)의 조율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1분의 손해가 있을 때마다 3두씩의 비율로 조세를 감면했으며, 손실이 10분 중 8분에 이르면 조세 부과를 면제하였다.
수손급손의 제도는 1393년(태조 2)에 다소 변하여 2분 이하의 재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고쳐졌으며, 다시 태종 때는 1분의 실(實)이 있더라도 1분의 조(租)를 거두며 1분의 손(損)이 있더라도 1분의 조를 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전법에서의 손실답험은 각 군현의 수령이 일차로 그 경내 전답의 손실을 답험하고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위관(委官)을 파견하여 재차 답험하고, 다시 관찰사의 수령관이 나가 3심하도록 했으며, 수조원이 개인에게 절수되어 있는 사전의 경우에는 그 수조권자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따라서 과전법체제에서의 수조(收租)는 손실답험을 통한 수손급손에 따라 수조율을 책정하는 정률세제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 1결당 최고 30두 한도 내에서 수조액이 책정되는 것이므로, 사전에서는 그 수조권자의 자의에 따른 과중한 수탈이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사전에서의 손실답험도 1419년을 기점으로 하여 공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답험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답험방식도 실제적으로는 공정을 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산야에 흩어진 전답을 일일이 답사하여 점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답험관의 자의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경차관(敬差官)의 파견제도 및 답험위관제도(踏驗委官制度)를 법제화했으나, 답험의 구체적 실무와 그 손실의 집계는 사실상 토호와 향리의 수중에서 자의적으로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 제정된 일종의 정액세법인 공법전세제는 이와 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추진된 것으로, 1444년에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 연분구등법을 골자로 하는 공법전세제가 확정되었다.
이 때 확정한 연분구등법은 ① 농경지의 매필지마다 손실답험함에 따라 자행되는 불공평성을 제거하기 위해 손실답험의 단위를 각 군현별로 정했으며, ② 연분은 농작에 따라 상상년(上上年) 1결 20두에서 상중년(上中年) 18두, 이하 차례로 체감하여 하하년(下下年) 4두로 하며, 그 이하는 면세하였고, ③ 각 군현의 수령이 심정(審定)한 연분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각 도의 관찰사는 도내의 군현별 연분을 중앙에 보고하면, 의정부 혹은 육조에서는 전체를 논의하여 각 도, 각 군현별 연분을 정하거나 혹은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다시 심사한 뒤 계문하여 연분을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농업생산력 수준으로는 1개 군현을 묶어서 하나의 연분등제(年分等第) 단위로 삼는다는 것은 큰 무리였다. 1454년(단종 2)에 가서는 각 군현마다 읍내와 4면으로 나누어 각기 연분을 등제하는 이른바 면 단위 등제의 방식으로 고쳐졌다. 연분등제의 실상은 15세기 말까지는 현지 수령 · 관찰사의 보고보다도 중앙에서 가등(加等)하여 세수의 증대를 기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으니, 그것은 외방 향리나 수령의 지나치게 낮은 책정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가서는 지주 · 전호제(佃戶制)의 확대와 공물 · 요역(徭役) · 군역 등 여타 수취관계가 가혹해지면서, 연분은 현지 수령 · 감사의 보고보다도 강등하는 방향으로 관행되어 갔으며, 16세기 후기에 가서는 이윽고 연분등제가 대개 하하(下下)의 1결당 4두로 고정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는 이른바 비총법(比摠法)이 시행되어, 수령 경유 각 도 관찰사의 작황 보고에 따라 그 작황에 해당하는 종전의 어느 연도분의 수세액을 기준으로 하여 당해 도의 세액과 재손의 결수(結數)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변천되어 갔다. 그러나 연분등제는 대개 하하의 단일 연분에 따라 1결 전세(田稅) 4두로 고정되어 갔으며, 이는 『속대전』에도 등재되어 조선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결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