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총법은 숙종 연간부터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된 부세 부과의 방식이다.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각 지방에 할당하는 세법으로 국가의 총 세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전결세를 비롯하여 어염선세, 노비신공 등에 이용되었다.
비총법은 전세(田稅) · 대동(大同) · 삼수미(三手米) 등 전결세(田結稅)를 비롯하여, 노비의 신공(身貢) · 어세(漁稅) · 염세(鹽稅) · 선세(船稅) 등의 징수에 광범하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전결세 수취에서의 비총법이다.
조선 전기의 전세는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그 해의 풍흉을 하지하(下之下)부터 상지상(上之上)까지 9등급으로 나눈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근거해 부과되었다. 1결당 징수하는 전세는 최하 4두부터 최고 20두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결정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점차 그 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등급에 따라 1결당 4두 내지 6두를 징수하는 정액 세제로 전환되었다. 그것이 1634년(인조 12)에 영정법(永定法)으로 법제화되었다. 이후 전세는 매년 가을 답험(踏驗)을 통해 재해를 입은 재결(災結)과 그렇지 않은 실결(實結)을 구별한 후, 실결에 대해서만 수취하였다.
재결을 조사하여 세를 면제해 주는 일련의 과정을 급재(給災)라 한다. 호조는 매년 작황을 고려해 재해로 인정할 만한 사유를 정리한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각도에 반포하였다. 수령은 양안에 실린 토지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 현황을 조사하였는데, 해당 토지가 경작되었는지 아닌지, 경작되었다면 재해를 입었는지 아닌지, 재해를 입었다면 연분사목 명목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등을 문서로 작성해 상부에 보고하였다. 감사는 이를 종합하여 다시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러면 중앙에서는 별도로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해 수령·감사의 답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복심(覆審)을 행하였다. 답험과 복심이 완료되면 중앙에서는 세를 면제할 토지 결수를 확정하여 지방에 통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이를 토대로 전세 등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답험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각종 비용이 가중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7세기 후반부터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토지에 부과되는 세의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으므로, 전결세의 부과 및 수취에 관한 운영을 종합적으로 재조정할 필요에 부딪히게 되었다.
또한 이앙법(移秧法)이 전국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전결세 징수의 기초 작업의 하나인 급재 운영의 수정이 요구되었다. 생산력의 증대, 토지 소유 관계의 분해에 따른 향촌 사회 구성의 변동 등 여러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중앙으로 들어오는 전결세 수입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총법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총법은 숙종 연간부터 시작되었으며, 1760년(영조 36)에 제도화되어 『만기요람(萬機要覽)』, 『대전통편(大典通編)』 등의 법전에 조문으로 실렸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꾸준히 실시되었다. 호조와 각 도 감사, 각 읍 수령이 급재의 주요한 주체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더 이상 경차관은 파견하지 않게 되었다.
호조는 가을이 되면 그 해와 작황이 비슷한 연도의 재결·실결을 확인하고, 그것을 연분사목으로 정리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이때 연분사목으로 정해진 재결을 사목재(事目災)라 하였다. 만약 사목재가 부족할 경우, 감사는 사유를 갖춰 재결을 더 지급해 달라고 중앙에 요청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추가로 정해진 재결을 장청재(狀請災)라 하였다.
감사는 사목재와 장청재를 통해 얻은 재결을 각 읍의 작황에 맞춰 고르게 분급해야 했다. 감사는 수령이 보고한 재실(災實) 상황을 바탕으로, 각 읍을 재해가 심한 순서대로 우심(尤甚)·지차(之次)·초실(稍實)로 구별하였으며 이에 맞춰 재결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수령은 재결을 다시 각 면리(面里)의 전결에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양안에 수록된 원장부전답(元帳簿田畓) 중 여러 가지 면세결(免稅結) 및 그 해의 재결을 뺀 나머지 실결에 대해서만 전결세가 부과되었다. 다만 평안도와 함경도는 관례적으로 원세(元稅)에서 3분의 1을 감해 주었으므로 연분사목을 통해 급재하지 않았고, 실결을 기준년과 비교해 비총하였다.
즉, 조선 후기에는 영정법·대동법 등의 실시로 결당 징수해야 할 세액이 고정되었으며, 비총법의 시행으로 인해 실결과 재결의 총액이 예측 가능한 선에서 결정되는 전결세 운영 원리가 확립되었다.
다만 사목재 결수가 실제 급재 대상 결수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므로, 향촌 사회에서 급재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았다. 이에 따라 백징(白徵)· 인징(隣徵)· 족징(族徵) 등의 폐단은 구조화되었으며, 각종 부세가 소민(小民)·빈농(貧農)에게 전가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해세(海稅)의 경우, 1784년(정조 7)부터 비총법이 실시되었다. 중앙에서는 어업과 관련하여 수익이 창출되는 시설물을 일체 조사한 후, 도별로 거둬야 할 해세의 총액을 고정하였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어전(漁箭)· 어조(漁條), 해수(海水)를 끓여 소금으로 만드는 가마솥인 염분(鹽盆), 미역을 따는 곽전(霍田) 등이 수세의 대상이었다. 각 도 감사는 해마다 이들 시설물로부터 세를 거둔 후, 중앙에서 비총으로 고정해 둔 액수만큼 균역청에 상납하였다. 해세의 총액은 비정기적으로 조정되었다.
노비 신공의 경우, 1745년(영조 21) 심성희(沈聖希)· 김상적(金尙迪) 등의 제안으로 경상도 지역에 비총법을 도입하였다. 노비의 이탈에 따라 신공이 계속 줄어들자 이를 막기 위해 도 단위로 수공(收貢: 신공을 거둠)해야 하는 노비의 숫자를 고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어느 읍에서 노비가 줄어들면 다른 읍에서 보충할 것을 요청하였다. 노비의 파악 및 신공 수취는 수령이 전담하였으며, 중앙에서 별도로 파견하던 추쇄관 제도도 이때 폐지되었다. 비총법은 이후 다른 도에 점진적으로 확대되다가 1774년(영조 50)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1778년(정조 2)부터는 왕실 소유의 노비에게까지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