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으로 1635년(인조 13)에 제정되었다.
세종 때 제정된 공법(貢法)은 전분6등(田分六等) · 연분9등(年分九等)으로 나누어 총 54등급의 과세 단위를 설정, 그 판정과 운영이 복잡했고 전체적으로 세율이 높아 현실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15세기 말부터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따라 쌀 4∼6두(斗)를 고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영정법은 이러한 관례를 법제화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그 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9등급의 새로운 수세액을 정한 것이다. 즉, 상상전(上上田) 20두, 상중전 18두, 상하전 16두, 중상전(中上田) 14두, 중중전 12두, 중하전 10두, 하상전(下上田) 8두, 하중전 6두, 하하전 4두였다.
여기에 경상도는 최고급지를 상하전 쌀 16두로, 전라도 · 충청도는 최고급지를 중중전 쌀 12두로, 기타 5도는 하하전 쌀 4두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에서도 대부분의 농지가 하중 · 하하전이었으므로 전세는 전체적으로 4∼6두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농지에는 전세 외에도 1결당 대동미 12두, 삼수미(三手米) 2두, 결작(結作) 2두의 정규 부세와 여러 가지 명목의 수수료 · 운송비 · 자연소모비 등의 잡부금이 부가되어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부담은 소작농민에게 전가되기 마련이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전세 수취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각 도의 농지 총 결수(結數)에 재해 면적을 계산해 삭감하고 수세의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1760년(영조 36)에 제정, 시행된 비총법(比摠法)이었다. 비총법은 영정법에 기초해 마련된 것으로 국가의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