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이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와 사사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후 관련된 인물들과 그 가족들까지 가혹하게 처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궁중 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 간의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며, 연산군의 폭정이 더욱 심화되어 중종반정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 · 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김굉필(金宏弼) · 이주(李胄)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정여창(鄭汝昌) · 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洪貴達) · 이심원(李深源) · 이유령(李幼寧) · 변형량(卞亨良) · 이수공(李守恭) · 곽종번(郭宗藩) · 박한주(朴漢柱) · 강백진(康伯珍) · 최부(崔溥) · 성중엄(成重淹) · 이원(李黿) · 신징(申澄) · 심순문(沈順門) · 강형(姜詗) · 김천령(金千齡) · 정인인(鄭麟仁) · 조지서(趙之瑞) · 정성근(鄭誠謹) · 성경온(成景溫) · 박은(朴誾) · 조위(曺偉) · 강겸(姜謙) · 홍식(洪湜) · 홍상(洪常) · 김처선(金處善) 등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의 자녀 · 가족 · 동족에 이르기까지도 연좌되어 연루자의 범위가 넓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사화는 표면상,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 사사 사건으로 인한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 격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일찍이 학문을 싫어해 학자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낭비 또한 극심,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를 메우기 위해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나눠준 공신전(功臣田)과 노비까지도 몰수하려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신하들의 이해 관계와 상충되는 것이어서 평소 왕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신하들은 왕의 처사에 더욱 반발하였다. 동시에, 궁중의 경비 절약도 간청해 왕의 향락적이고 무궤도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연산군의 방종을 충동질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 한 신하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 상황 속에서 신하들은 궁중과 부중(府中)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 배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 임사홍이 궁중 · 부중 양파의 대립 관계와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무오사화 때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愼守勤)과 손을 잡고 부중의 훈구 세력과 무오사화 때 남은 신진사류까지도 일소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이 사화의 결과, 궁중 세력이 승리해 정권을 잡고, 신진사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무오사화가 기성 훈구 세력과 신진사류 세력의 정치 투쟁이었다고 하면, 갑자사화는 궁중 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과의 정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교습 및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 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 변동과 정치 문화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