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정자순(鄭子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설(鄭舌)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정척(鄭陟)이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구황적간(救荒摘奸)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487년에는 시강관으로 경연에서 용인(用人)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해 직제학이 되었다. 그가 선위사로 대마도에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호초(胡椒) 등을 모두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눠주게 했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여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 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기도경차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 해주목사로 재직할 때의 부정으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 동안 수묘했으며, 1495년(연산군 1) 행호군으로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다시 정계에서 축출되었으나,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 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錄用)되었다. 1507년(중종 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광주(廣州)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