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궁중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매우 오래된 출산풍속에서 유래된 것이며, 그것이 궁중의식으로 제도화한 것은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비빈(妃嬪)에게 아기를 낳을 징후가 보이면, 태의원제조(太醫院提調)는 모든 집사관을 거느리고 산전방(産殿房 : 아기를 낳는 방)에 들어가 길한 방향에 출산할 자리를 마련하고, 산전방의 사방에 순탄 출산을 비는 부적을 붙이며, 헌청(軒廳)에 방울을 달아 유사시에 의관을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다음에는 현초(顯草 : 산후의 거적을 처리함)할 문을 정하고 그 대들보에 못을 박아 붉은 끈을 드리워 두었다가 출산이 끝나면 그 못에 매어달아 7일이 지난 뒤 청상(廳上)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조신 가운데 자식이 많고 가정에 재난이 없는 사람을 권초관(捲草官 : 출산 후 거적 자리 등을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처리하는 감독관)으로 뽑아 은·쌀·비단·실 등을 갖추어 분향하여 명을 빌고, 그 고석(藁席 : 아기를 낳은 거적자리)을 칠궤(漆櫃 : 옻칠을 하여 장식한 상자)에 넣어 붉은 보자기로 싸서, 남자의 경우 내자시(內資寺), 여자의 경우 내섬시(內贍寺)의 창고에 보관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