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저, 즉 왕세자 책봉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신묘년(辛卯年)의 시사(時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왕비의 소생인 원자(元子)가 없었고, 다만 후궁 소생의 왕자만이 있었으므로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이 건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정철(鄭澈)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부제학 이성중(李誠中), 대사헌 이해수(李海壽) 등과 같이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또, 정철은 이 건저 문제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에게도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한편, 이산해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김빈(金嬪)의 오빠되는 김공량(金公諒)과 결탁, 왕의 뜻을 살피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이산해는 왕이 김빈의 소생 신성군 후(信誠君珝)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김빈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김빈이 왕에게 이 사실을 울면서 호소하게 되자 왕은 이에 매우 노하게 되었다.
그 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정철은 경연에서 건저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때문에 왕이 크게 노하자 같은 자리의 이산해·유성룡 등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건저 문제를 발설한 서인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이해수 등은 모두 외직으로 강등되었다. 이것은 군주전제국가에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문제가 동서분당의 쟁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즉, 당쟁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당한 동인들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원인이 된 옥사였다.
즉, 정철 등 서인들이 당시 정여립을 옹호한 동인들을 정여립과의 공모자로 몰았던 것이다. 이에 동인인 이발(李潑)·이길(李洁)·백유양(白惟讓)·유몽정(柳夢井)·최영경(崔永慶) 등은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정언지(鄭彦智)·정개청(鄭介淸) 등은 귀양가게 되었으며, 노수신(盧守愼)은 파직당하였다.
이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이 희생되고, 또 정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옥사의 보복으로 꾸며진 것이 바로 건저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