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계문(季文), 호는 청호(晴湖). 좌찬성 성억(成抑)의 후손으로, 증조는 성세경(成世鏡)이고, 할아버지는 성염(成廉)이며, 아버지는 성팽로(成彭老)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다. 생원·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에는 하루에 시 30여 편을 지어 함께 공부하던 김일손(金馹孫)·조위(曺偉) 등을 놀라게 하였다.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기 위하여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1497년(연산군 3)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으로 승진한 뒤 박사에 이르러 경연사경(經筵司經) 및 춘추관사관을 겸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경연관으로서 명현들의 무고한 화를 변호하다가 인산(麟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500년 하동으로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과거 홍문관에 있을 때 왕의 후원관사(後苑觀射: 궁궐 뒷 정원에서 활쏘기를 관람했던 일)를 논계(論啓)하였던 죄로 먼 곳으로 유배된 뒤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