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할아버지는 이담(李擔)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이희(李瞺)이다. 어머니는 안등(安騰)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궁직(宮直)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52년(문종 2)에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 되었으며 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정랑에서 집의를 거쳐 1460년에는 시를 잘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승지로 발탁되었고, 예문관직제학으로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였으며, 집의·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우부승지가 되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교정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463년에 형조참판·이조참판에 이르러서는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윤을 거쳐,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러서는 표류민을 돌려보낸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었다.
그 해 귀국하던 중 통주(通州)에서 병사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국량(局量)이 있었으며, 침묵을 지켜 말이 적고 비록 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침착하고 조용하게 처리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나, 첩을 두지 않고 조카로 후계를 삼았는데도 가정이 화목하고 엄하였다.
뛰어난 문장과 품격 있는 대화로 널리 알려지고 존경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이 슬퍼했다고 한다. 『북정록(北征錄)』을 교정하였으며, 시호는 문안(文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