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중(平仲), 호는 송국재(松菊齋)·소은(蘇隱).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종선(李種善)이고, 아버지는 영중추원사 이계전(李季甸)이며, 어머니는 진호(秦浩)의 딸이다. 이개(李塏)의 동생이다.
1450년(세종 32) 진사가 되고, 이듬 해 증광 문과에 급제, 교서관저작랑(校書館著作郎)·집현전박사·응교·지승문원사·집의·보덕 등을 거쳐, 1462년(세조 8) 판내자예빈사(判內資禮賓事)로 예문관을 겸하였다. 이듬 해『동국통감(東國通鑑)』 찬수에 참여했고, 이 해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우승지를 거쳐 1465년 도승지·공조참의를 지냈다.
이듬 해 한성부좌윤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67년 호조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 해 대사성이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5년(성종 6) 이조참판이 되어『삼국사절요』를 편찬하여 바쳤으며, 이 해 덕종의 부묘문제(祔廟問題)가 일어나자 적극 반대하였다. 이듬 해 지중추원사로 정조사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했으나, 평안도로 이주시킨 남도의 백성들이 흩어지자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80년 다시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예문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예조판서 때 직무수행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왕으로부터 서각띠[犀角帶]가 하사되었고, 품계도 숭정대부(崇政大夫)으로 승진되었다.
1485년 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이 되고,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폭음으로 죽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았으나 교만하거나 뽐내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또한 자질이 호탕, 활달하며 총명하고 특히 담론을 잘 했다. 성리학에 밝았고 고제(古制)에 해박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