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대제학 신장(申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신면(申㴐)이다. 어머니는 우군사용(右君司勇) 정호(丁湖)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처음으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수찬·교리를 역임하였으며,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94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간언(諫言)으로 문제가 되어 평시서령(平市署令)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497년에는 검상(檢詳)이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신용개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속삼강행실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