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은 ≪경국대전≫에 나타나고 있다.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죄를 범해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 : 뇌물을 받거나 직권으로 재물을 탐한 관리)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과 함께 문 · 무과(文武科),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 잡과(雜科)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얼은 법에 의해 사회적 차별 대우가 규정되고 또 그 차별 대우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편찬된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에는 잡과에 한해, 2품이상 관원의 첩의 증현손(曾玄孫)의 응시가 허용되었다. 문무과 및 사마시는 1553년(명종 8) 양첩자(良妾子)의 손대(孫代)부터 허용되었으나 바로 폐지되었다.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얼허통책은 확대 실시되어 납속(納粟) · 군공(軍功) · 기타 공훈(功勳)에 의해 허통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란 극복을 위한 일시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에 임란 후 선조 말년에는 허통로가 다시 막혔으며, 서얼 허통은 인조반정 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1625년(인조 3) <허통사목 許通事目>이 제정되어 양첩자(良妾子)는 손(孫), 천첩자(賤妾子)는 증손대(曾孫代)부터 허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외된 양첩자의 자(子), 천첩자의 자(子) · 손(孫)은 기민진휼(飢民賑恤 :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함.)을 위한 진자곡(賑資穀) 마련 등을 위해 수시로 실시된 납속책을 통해 허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얼은 과거에 허통 후 응시하되 반드시 ‘허통(許通)’으로 녹명(錄名 : 이름을 기록함.)하도록 했다. 군직(軍職) 가자(加資) 등 가자가 있는 서얼은 직명(職名)으로 녹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45년(인조 23)부터는 호종한 공이나 전공으로 관직에 나아간 서얼 외에는 군직 가자 등이 있어도 직명은 사용하지 못하고, ‘허통’으로 녹명하게 했다. 이를 위반한 서얼은 정거(停擧 : 과거의 응시자격을 정지시킴.)시키고 치죄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얼들은 녹명 규정을 잘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 규정이 서얼 본인에게만 해당되며, 그들의 자손은 반드시 ‘허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후기에는 미허통 서얼의 불법적인 과거 응시도 빈번했으나, 국가에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의 서얼들이 소를 올려 납미부거법(納未赴擧法 : 납속하지 못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한 법)의 부당성을 알리고 철폐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1696년과 1625년(인조 3)의 <허통사목>에 포함되지 않았던 양첩자의 자, 천첩자의 자손대의 허통로였던 납속허통법을 폐지하여 납미 허통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서얼들이 정국 동향에 민감하여 집권당과 연계하여 허통운동과 통청(通淸) 등 관계(官界) 소통운동을 전개했던 점도 작용했다. 특히 1694년(숙종 20) 소론에 의한 갑술환국(甲戌換局) 성공에는 서얼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99년에는 서얼 자손들이 호적(戶籍)에 유학(幼學)으로 기록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또, 1708년에는 과거시험에도 ‘허통’이 아니라 유학으로 녹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서얼 허통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는데, 1777년(정조 1)<정유절목 丁酉節目>을 제정하여 서얼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分館)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종전대로 교서관(校書館) 및 수문장(守門將) · 부장(部將)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 · 형조 · 공조의 참상(參上), 음직(蔭職)으로는 해당 관사(官司)의 판관(判官)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外職)에서는 문무 당하관은 부사(府使), 당상관은 목사(牧使)까지 허용했다.
음직으로 생원 · 진사 출신자는 군수(郡守)를 허용하되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까지 허용하였다. 그리고 생원 · 진사 출신이 아닌 자와 인의(引儀) 출신자는 현령(縣令)을 허용하되 치적이 있는 자는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교서관에 한정하나 직강(直講) 이하 관직은 구애받지 않으며, 무신은 도총부(都摠府)는 안되지만 중추부(中樞府) · 오위장(五衛將) 등은 구애받지 않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무의 여러 직에 대한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정조는 1779년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문식(文識)있는 서얼들을 다수 등용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문신(抄啓文臣) 가운데에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순조 이후 세도정치기에는 권력이 소수의 벌열가문(閥閱家門)에 집중되어 관리 임용도 문벌위주로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계 진출 역시 부진하였다. 이에 1823년(순조 23) 만 여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 癸未節目>이 제정되어 통청(通淸)이 허용되었고, 또 서얼의 한품이 종2품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1851년(철종 2)에는 지금까지 사족만이 들어갈 수 있던 승문원(承文院)과 선천(宣薦 : 무과 급제자 가운데 선전관에 뽑힐 수 있는 자를 추천하던 제도)에 허통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서 적첩(嫡妾)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부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사노비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서얼금고가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