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과전은 고려 후기에 녹봉(祿俸)을 보충할 목적으로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던 토지이다. 고려 정부가 강도(江都)에 천도 중이던 1257년(고종 44)에 분전대록(分田代祿)의 원칙을 마련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 1272년(원종 13)에 시행한 제도이다. 제도의 취지는 녹봉을 대신하여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경기 8현의 토지 가운데 양반조업전 외 반정을 혁파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녹과전은 고려 후기에 부족해진 녹봉을 보충하는 한편 유명무실해진 전시과를 대신하여 관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녹과전(祿科田)의 설치는 무엇보다 부족한 녹봉(祿俸)을 보충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고려 토지 제도의 주축인 전시과(田柴科)는 12세기 초부터 붕괴되기 시작해, 무신 집권기에는 관리 · 군인 · 한인(閑人) 등을 위한 보편적 생활 보장책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국고 수입의 차질로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녹봉의 지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강도(江都)에 천도 중이던 1257년(고종 44)에 토지를 분급해 녹봉에 대신하게 한다는 분전대록(分田代祿)의 원칙을 마련하고,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세워 강화도의 토지를 관리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뒤 1271년(원종 12)에 분전대록의 선례를 확대시켜,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관리에게 토지를 분급한다는 원칙을 마련하고, 이듬해에 녹과전을 시행하게 되었다.
녹과전은 관리들의 녹봉을 보충하는 생활 보장책으로서 마련되었지만, 대몽전쟁을 마무리 지은 고려 조정이 새로이 체제 정비를 꾀하는 가운데 설치된 것이다. 설치 지역은 경기(京畿) 8현(八縣)에 한정되었다. 그것은 지급 대상자인 관리들에게 경기의 땅을 주어 예우하고 편리를 제공하는 한편, 토지 겸병과 농장(農莊) 발달이 성행하는 추세 속에서 녹과전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분급 대상은 문무관(文武官) · 백관(百官) 또는 양반(兩班)으로 총칭되어 나타나지만, 녹봉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문무반록(文武班祿)의 지급 대상과 거의 일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급 결수(結數)는 알 수 없지만 전시과의 경우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관련하여 사료에는 경기 8현의 양반조업전(兩班祖業田)을 제외한 반정(半丁)을 혁파하고 녹과전을 두었다고 한다. 여기서 경기 8현이란 장단(長湍), 송림(松林), 임진(臨津), 토산(兎山), 임강(臨江), 적성(積城), 파평(坡平), 마전(麻田)으로 여겨지며, 양반조업전과 반정을 비롯하여 녹과전이 설정된 토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일단 양반조업전은 공음전시(功蔭田柴)이며 반정이란 양반의 직전(職田), 곧 전시과에 의해 지급된 양반전(兩班田)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녹과전은 종래의 과전(科田)을 혁파하고 설치된 것이다. 다음으로 양반조업전은 양반의 소유지를 뜻하며, 여기에는 양반구분전(兩班口分田)과 같은 과전이 사유화된 경우도 포함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녹과전은 종래의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가 조업전화(祖業田化)되는 가운데 관료에 대한 토지 분급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새롭게 개간된 토지를 지급한 제도였다. 한편 고려의 전시과를 부곡(部曲) 지역에 설정된 전시과 계열 토지와 군현(郡縣) 지역에 있는 정전(丁田) 계열 토지로 구분하면서, 녹과전은 바로 군현 지역에 있는 정전 계열의 토지를 혁파하여 양반 관료에게 녹봉으로 지급하게 한 제도로 보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양반조업전은 양반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전시과에 의해 지급된 양반전을 포함하며, 반정은 전정연립(田丁連立)에 따라 운영되는 전시과 계열의 토지이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기에 녹과전에 의해 수조지로 재편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위와 같이 녹과전이 설치된 토지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녹과전의 소유 관계와 경영 실태 역시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녹과전은 사전(私田)으로 간주되어 병작반수(竝作半收)의 관행에 따른 전호제(佃戶制)에 입각하여 운영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대체로 10분의 1의 세율이 적용되는 수조권(收租權)이 지급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녹과전은 당초 녹봉을 보충하기 위해 설치, 분급되었지만, 녹봉의 지급이 정상화된 다음에도 존속됨으로써 실제로는 녹봉과 병존하였다. 1278년(충렬왕 4)에는 다시 고쳐 절급(折給)되었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겸병당한 녹과전을 적절하게 살펴서 다시 절급하도록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권귀(權貴)들에게 탈취당한 녹과전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경기 8현의 모든 토지에 대한 경리(經理)를 행하면서 개편, 보강되어 직전의 이름으로 분급되었다. 이것은 당시 문란해진 정치 질서로 조장된 토지 제도의 혼란을 보여 준다.
녹과전은 당초 분전대록의 원칙에 따라 녹봉을 보완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였다. 그러므로 제도가 운영되는 동안 녹봉 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 녹과전은 수조권의 분급이라는 측면에서 전시과와 동일한 토지 분급 제도였다. 그러므로 녹과전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전시과를 대체하여 관인의 직전으로서 기능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녹과전은 녹봉과 전시과라는 관인에 대한 두 가지 경제적 대우가 붕괴하는 가운데 설치되어 이후 조선의 과전법(科田法)과 녹봉을 연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에 녹과전의 성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시과와 과전법을 연결시켜 주는 제도적 장치로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녹봉을 보완했다는 측면에서 이후의 사전(私田) 개혁 및 과전법과의 연결성은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녹과전의 의의는 향후 연구에 따라 계속해서 가감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