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들에게 토지와 더불어 녹봉도 지급하는 이원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장한 예는 선대 중국의 주(周) ‧ 한(漢) 대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녹봉제 실시의 이론적 근거는 통일신라시대인 689년(신문왕 9)과 757년(경덕왕 16) 사이에 약 70여 년간 관료전(官僚田)과 녹봉[歲租]을 지급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고려가 채택한 녹봉제는 당(唐)나라의 녹봉제가 아니라 송(宋)나라 제도를 수용한 것이다.
당나라는 문무관의 직분전(職分田)을 9품등으로, 녹봉제를 18과등(科等)으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전시과(田柴科)를 18과등으로 구분하고, 녹봉제를 47과등〔문무반록(文武班祿)〕으로 구분한 것은 당나라와는 달리 송나라 제도와 유사한 것이다. 고려에서는 '법당체송(法唐體宋)'이라 한 바와 같이 당제를 바탕으로 하여 송제를 채택하였다. 재신(宰臣) 이하 악독묘령(岳瀆廟令)에 이르기까지 41과등으로 구분한 송나라의 녹봉제는 1760년(문종 30)에 정비된 고려의 녹봉제와 아주 흡사하다.
당나라의 녹봉제는 관품을 기준하여 18과등으로 구분한 데 비하여 송나라의 녹봉제는 관품보다 관직에 기준을 두어 41과등으로 구분하였다. 이것은 고려 녹봉제의 문무반록이 47과등으로 관직을 기준하여 정비된 것과 아주 비슷한 것이다. 고려의 관제 가운데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 송나라 제도를 수용한 것이 많은 것과 같이 고려의 녹봉제도 송제를 수용한 것이다.
고려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는 성종 대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 대에 거의 완성되었다. 고려 왕조의 중앙집권적인 체제 확립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관료 조직의 정비라 할 수 있고, 그 관료 체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은 토지 제도와 녹봉제의 정비라 할 수 있다. 고려 전시과 제도와 녹봉제의 정비는 바로 이러한 관료들에 대한 대우 제도가 이원적으로 정비된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말 여초 후삼국의 혼란기를 극복한 고려 왕조는 국초에 개국 공신, 귀순 인사, 지방 성주들에게 녹읍(祿邑)을 지급하였다.
신라 때부터 시행되어 오던 녹읍은 757년(경덕왕 16)에 다시 부활되어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성행된 것으로, 조세(租稅), 공부(貢賦), 역역(力役) 등 경제적 수취를 해갈 수 있도록 허용한 일정한 지역을 의미한다. 녹읍에서 수취되는 녹은 국록(國祿)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녹봉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국가에서 현물을 사급하는 녹봉제와는 경영 형태나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국초에 녹봉의 성격을 지니고 현물이 지급된 예는 녹읍제의 폐지와 더불어 그 자취를 감추면서 국초의 공역자들에게 역분전(役分田)과 예식(例式)이 지급되었다.
역분전은 국초의 공역자를 4등급으로 구분하여 미곡을 사급한 것으로 녹봉의 성격을 지닌 특수한 대우 방법이었다. 예식 급여는 후삼국 통일을 즈음하여 시행되어 오다가 949년(광종 즉위년)에 이르러 고정되었다. 이 예식과 역분전의 지급은 관료들에게 토지와 녹봉을 지급하여 이원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장한 선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식의 지급은 고려의 일반적인 녹봉제가 실시되고 있는 후대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아 고려의 일반적인 녹봉제와는 그 성격이 다른 특수한 대우 방법이었다.
965년(광종 16)에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의 경우에서 예식이 아닌 녹봉이 급여된 것은 내의령이란 관직에 대해 녹봉이 지급된 것으로 고려적인 녹봉제의 효시라 여겨졌다. 광종 때에 역분전을 받은 공신 세력이 많이 물러나고, 사색공복이 제정되었는데, 그 사색공복을 바탕으로 976년(경종 1)에 시정전시과가 실시되었다.
976년(경종 1)의 시정전시과가 실시된 이후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체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모든 관료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지급받게 되는 녹봉은 관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특수한 대우 방법으로 지급되었던 녹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996년(성종 15)에 내사령 서희(徐熙)의 경우에 치사록(致仕祿)이 지급되었던 예로 보아 녹봉은 관료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뿐만 아니라 퇴관 후의 생활 보장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치사록을 지급받기 이전에 실직의 내사령에 대한 녹봉이 지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성종 이전에 실시된 녹읍과 녹봉, 역분전과 예식은 국초의 공역자들에게 특수한 대우 방법으로 지급된 것으로, 성종 대에 고려적인 관계(官階)와 관직을 기준하여 지급된 녹봉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965년(광종 16)에 내의령 서필에게 녹봉이 지급된 것이 고려적인 녹봉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녹봉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하는 성종 대부터 시작하여 문종 대에 정비되었다.
관계와 관직이 녹봉 지급의 기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종 이후의 녹제에 관한 기록 가운데 특히 1032년(덕종 원년)에 제정된 동경관록(東京官祿)의 구체적인 녹액 규정을 통해서 보면 모든 관료에게 일정한 녹액 규정에 의거해서 녹봉이 지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 고려사』 식화지 녹봉 조에는 1061년(문종 15) 이후 1275년(충렬왕 원년)에 관제 개편 이전의 관직을 대상으로 1076년(문종 30)에 녹제가 정비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녹봉은 관료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지급받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한 것으로, 관제가 정비되는 바탕 위에서 재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녹봉제는 고려의 모든 관제와 토지 제도가 일단 정비되는 문종 대에 이르러 송나라 제도를 수용하면서 크게 정비되었다.
문종 이전에 실시된 녹봉제는 고려 녹제의 정비 작업이 단계적으로 추진되어 온 것을 뜻한다. 1076년(문종 30)에 정비된 고려의 녹봉제는 ① 비주록(妃主祿), ② 종실록(宗室祿), ③ 문무반록(文武班祿), ④ 권무관록(權務官祿), ⑤ 동궁관록(東宮官祿), ⑥ 서경관록(西京官祿), ⑦ 외관록(外官祿), ⑧ 잡별사(雜別賜), ⑨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 등 모두 9개 항목으로 정비되었다.
1076년(문종 30)에 9개 항목으로 정비된 고려 녹봉제는 그 후 예종 대에 새로 주진장상장교록(州鎭將相將校祿)이 더 추가 정비되었고, 인종 대에 이르러 다시 경정되었다. 인종 경정 녹제는 문종 이후 관제 개혁에 따른 후속 조처와 겸직제로 인한 관직 운영의 변화 등 녹제 자체 개편의 필요성이 작용하여 경정된 것으로 고려 녹봉제로서는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이다.
그 개편은 주로 문무반록과 외관록이 가장 변동이 많았고, 그 다음이 종실록, 동궁관록, 그 다음 권무관록, 비주록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서경관록, 잡별사, 제아문공장별사는 별 변동 없이 종전대로 습용(襲用)되었고, 치사관록이 새로이 증설되었다. 예종 대에 추가로 정비된 ⑩ 주진장상장교록과 인종 대에 새로이 증설된 ⑪ 치사관록을 합하면 고려 녹봉제는 모두 11개 항목으로 완비된 셈이다.
고려 녹봉제 가운데 가장 최초로 정비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 동경관록을 비롯하여 외관록 정비에 관한 기록은 오류와 누락 등 보완되어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1032년(덕종 1)에 동경관록의 정비에 이어서 문종 대에 외관록의 정비가 일단 이루어지고, 인종 대에 다시 개정되어 인종 경정외관록이 정비되면서 고려 외관록제가 완비되었다.
고려 녹봉제 정비의 전반적인 기본 골격은 3경 · 4도호부 · 8목을 비롯하여 방어주(防禦州)와 지주부군(知州府郡), 방어진(防禦鎭)과 여러 진(鎭) · 현령(縣令) · 현위(縣尉) 및 여러 감무(監務)와 13창 판관의 녹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외관록제 정비의 기본 구조는 1018년(현종 9)에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1018년(현종 9)에 4도호 · 8목 · 56지주군사(知州郡事) · 28진장(鎭長) · 20현령이 설치되어 고려 지방 제도의 기본 체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문종 외관록에서는 3경 · 8목 · 1대도호부 · 16주 · 6부 · 5군 · 1진 · 25현의 녹봉이 규정되어 있고, 인종 경정외관록에서는 3경 · 2대도호부 · 2소도호부 · 8목 · 49주 · 6부 · 6군 · 25진 · 46현 · 13창의 녹봉이 정비된 것으로 나타나 있어 상당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시간적 변천에 따른 군현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었다. 군현 관계 변화에 관한 후대의 역사적 사실도 문종 외관록과 인종 경정외관록에 반영이 되어 있어 외관록조의 기록이 복잡하고 난해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 지방 제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3경 · 4도호부 · 8목이었다. 3경은 서경 · 동경 · 남경으로 3경 유수관의 직제는 995년(성종 14)부터 1067년(문종 21)에 이르러 갖추어졌다. 이들의 녹봉은 덕종 원년에 동경관록 정비에 이어 문종 대에 3경의 외관록이 정비되었다. 문종 때 정비된 3경 유수관 녹제 가운데 동경 부유수 66석 10두는 166석 10두로 기록이 잘못된 것이었고, 남경 법조의 녹과가 빠진 것은 20석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인종 경정외관록에서 3경 부유수의 녹봉 전체가 빠져 있는 것은 서경 부유수 166석 10두, 동 · 남경 부유수 120석으로 보완하고, 서경 녹사(錄事) 46석 10두에서 녹사는 사록(司錄)의 잘못된 표기이며, 동 · 남경의 사록의 녹봉이 빠져있는 것은 46석 10두로 보완해야 할 것이다.
4도호부는 이전의 5도호부에서 1018년(현종 9) 이후 여러 번 개편된 안서 · 안북대도호부와 안변 · 안남소도호부를 지칭한 것이다. 4도호부 가운데 문종 외관록에서는 안서대도호부의 녹봉만 나타나 있고, 나머지 3도호부의 녹봉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1018년(현종 9)의 안서도호부가 아니라 1122년(예종 17)에 대도호부로 개편된 안서대도호부의 녹봉만 나타나 있다. 이것은 1122년(예종 17)의 사실이 소급되어 문종 외관록에 반영되어 있다.
인종 경정외관록에서 4도호부의 녹봉 가운데 안남도호부 수주(樹州)는 1150년(의종 4)에 도호부로 승격된 곳이다. 안남도호부 전주가 전주목으로 된 1022년(현종 13)부터 1150년(의종 4) 사이에는 3도호부만 있었다. 그러므로 인종 경정외관록에 나타나 있는 4도호부의 녹봉 가운데는 1150년(의종 4) 이후의 역사적 사실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종 경정외관록에서 안서 · 안북대도호부 사(使)의 녹봉이 보이지 않는 것은 기록 누락으로 166석 10두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1018년(현종 9)에 당시의 7목에서 안남대도호부 전주가 1022년(현종 13)에 전주목으로 되면서 8목이 성립된 것이다. 8목은 광주 · 충주 · 청주 · 진주 · 상주 · 전주 · 나주 · 황주이다. 문종 외관록에 나타나 있던 8목 목사의 녹봉이 인종 경정외관록에 보이지 않고, 그 외에는 양 녹과가 서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인종 경정외관서 8목 목사의 녹봉이 보이지 않은 것은 기록의 누락으로 166석 10두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하 방어주의 녹봉, 지주부군(知州府郡)의 녹봉, 방어진의 녹봉, 여러 진의 녹봉, 현령 · 현위 및 여러 감무(諸監務) · 13창(倉) 판관의 녹봉 등에 수정 · 보완되어야 할 점이 많다.
녹제의 운영 실태를 보면 1088년(선종 5)에 출관(出官)과 차임(差任)의 조건에 의한 반록규제법이 설정되고 반록 시기는 정월 7일과 7월 7일, 연 2회 정기반록일이 있었다. 전기의 반록을 초번록(初番祿), 후기 반록을 봉창록(封倉祿)이라고 하였으며, 월봉이 지급된 예도 있었다.
녹패(祿牌)는 인일(人日: 정월 7일)에 백관에게 하사되었다. 그 녹패에 의거하여 녹봉을 지급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매매되기도 하였다. 녹봉의 품목은 미(米) ‧ 속(粟)‧ 맥(麥) 등이 중심 품목이었고, 견(絹) ‧ 능(綾) · 라(羅) · 수(袖) · 포(布) 등이 미곡과 환산되어 지급되기도 하였는데, 절가(折價)의 기준이 쌀[米]이었던 만큼 녹전미(祿轉米)가 가장 중심 품목이었다.
고려 녹봉제는 녹봉과 별사(別賜)로 구별하여 품관직에 지급한 것은 녹봉이라 하고, 품외직에 지급한 것은 별사라고 하였다. 별사에는 주로 이속(吏屬)들에게 지급된 잡별사(雜別賜)와 제아문의 공장(工匠)들에게 지급된 공장별사(工匠別賜)로 구별되었다. 다 같이 직역(職役)에 종사한 날 수를 기준하여 별사록을 지급한 것으로서 조선시대 도목(都目)과 번차(番次)에 따라 직사(職事)에 근무할 때 지급되는 체아록(遞兒祿) 가운데 잡직 체아록과 유사한 것이다.
녹봉의 재원이 되는 토지는 민전(民田)이었고, 양계(兩界)와 서경 관내를 제외한 전국 민전조(民田租)의 약 13만 9376석 13두 정도가 녹전(祿轉)으로 개경의 좌창(左倉)에 세입되어 중앙관의 녹봉에 충당되었다. 서경관록은 서경 대창(大倉)에 세입되는 1만 7722석 13두 세량(稅粮)으로 충당하였다. 외관록은 처음 녹제 정비 당시에 반은 좌창에서 반은 외읍(外邑)의 공수조(公須租)에서 지급되었으나, 1101년(숙종 6) 이후부터는 완전히 외읍의 공수조에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녹봉의 재원으로 민전조 외에 공부도 그 재원의 일부가 되었다.
고려 관리들의 경제적 기반의 약 절반 정도는 전시과의 전조(田租)의 수입에 의존하고, 그 외의 절반은 녹봉에서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재정 운영 방법은 전시과의 경우는 전주(田主)와 전호(佃戶) 사이에 간접 지배밖에 못하도록 국가 권력이 개입되어 수조권(收租權)의 사유를 인정한 공적 색채가 강한 것에 비하여 녹봉은 국고에서 공적 성격을 띠고 지급된 것으로 그 운영 방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고려 녹봉제는 관리들이 직사에 종사한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 국가가 응분의 대가를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는 생활 보장 제도였다. 그 지급 원칙은 직사에 종사하는 현직주의 원칙에서 지급되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 녹봉제는 관료적 성격의 일면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고려 녹봉제는 현직주의 원칙에 의거해서만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실직이 아닌 치사관록 · 검교관록(檢校官祿) · 종실록 · 봉군록(封君祿) 등은 현직주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관료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족적 성격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종실록을 제정하여 종친을 우대하고 3품 이상의 퇴직자에게 치사록을 지급하여 그들을 우대한 것이나, 후대의 일이지만 검교관록을 설정하여 훈관(勳官)을 우대한 것이나, 종실(宗室) 봉군(封君)과 이성 봉군을 포함하여 별도로 봉군녹과(封君祿科)를 설정한 것 등은 음서(蔭敍)나 공음전(功蔭田)의 지급 못지않게 녹봉으로 귀족들의 특권을 경제적으로 보장한 고려 사회의 귀족적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비주(妃主) · 종실 · 봉군 · 검교관 · 치사관 등의 특권적 귀족 신분층과 정직의 품관에게 지급된 것을 녹봉이라 하고, 하위 품외직의 이속이나 기타 직역에 종사하는 신분층에 지급된 녹봉을 별사라 하여 구별한 것도 귀족 사회의 특징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산직(散職) 체계 3품 이상의 치사직에는 치사록을 지급하여 우대한 것은 귀족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기타 산직에는 녹봉을 지급하지 않고 현직주의 원칙을 고수하여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산직 체계 3품 이하의 산관(散官)이나 동정직(同正職) 체계의 품관은 검교직에 종사할 때 한해서 권무관록이 지급되었다. 즉 권무관록은 정직의 품관이 아닌 산직 체계의 품관으로서 정직 품관의 실무직 외에 특정한 직무에 종사하는 품관에게 지급된 녹봉으로 조선시대 도목과 번차에 따라 직무에 종사할 때 지급되는 동서반 체아록과 유사한 것이다.
고려 녹봉제의 변천에 대해서는 고려 전기에 정비된 녹과제가 후기에 이르러 어떻게 변천되었는가 하는 추이를 전시과 제도가 붕괴된 이후의 고려 토지 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았다. 1076년(문종 30)에 정비된 고려 녹봉제는 그 후 12세기 초엽 인종 대에 다시 경정되어 고려 녹봉제가 최종적으로 완비되었다.
고려 녹봉제가 정비된 이후 인종 경정녹봉제가 완비되는 시기에 즈음하여 이미 토지 겸병의 문이 열려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초엽 인종 대였으나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것은 12세기 말엽 명종(明宗) 대부터였다. 12세기 말엽 무인 집권을 계기로 토지 겸병이 본격화되고, 전시과 체제가 급격히 붕괴됨으로써 이에 수반하여 품록의 감소, 녹봉의 전용(轉用) 지출 등 녹봉 지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인정권의 기능도 몽골과 항전하던 강도(江都) 초기를 전후하여 전화(戰禍)로 인한 전야(田野)의 황폐와 삼별초(三別抄)의 난, 일본 원정에 따른 전비 부담의 급증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놓이게 되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녹봉제 자체가 소멸된 적은 없었으며, 재상의 녹봉이 수곡(數斛)에 불과할 만큼이나마 그 명맥은 유지되어 왔다. 이리하여 당시 품록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한 새로운 해결책으로 녹과전(祿科田) 분급 이론이 1257년(고종 44) 6월에 처음 제기되어 같은 해 9월 강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 환도 이후 경기 일원에 통치력이 회복되자 1271년(원종 12)에 정식으로 녹과전 제도(祿科田制度)가 성립되었다.
고려 후기의 녹봉제도 1257년(고종 44) 9월에 강도에서 녹과전이 처음 지급되었던 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7개월 후 1258년(고종 45) 4월에 실시되었다. 1258년(고종 45) 4월에 강도에서 최의(崔竩) 사창(私倉)의 곡식을 임시 편법으로 지급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려 전기 인종 경정녹제 이후에 새로이 등장한 후기 반록 규정의 첫 효시가 되었다. 고려 후기 녹과 규정은 전기의 문종 녹제(47과등)나 인종 녹제(29과등)에서와 같이 같은 품계라도 직(職)에 따라 많은 과등을 설정한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9품등에 의한 9과등제를 채택하였다.
고려 후기 전시과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이 나타난 녹과전과 후기 녹과 규정은 관료들에 대한 대우 방법이 전기에는 전시과와 녹봉, 후기에는 녹과전과 녹봉(9과등제)의 이원적 대우 체제로 변천된 것을 의미한다. 이중으로 받게 되었지만 그들의 재정적 궁핍은 면할 수 없었다.
개경 환도 이후 원나라의 정치적 지배 아래에 접어들면서 강도 시절보다는 점차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과 권세가들의 광범위한 토지 겸병으로 재정난은 계속되어 품록의 감소, 체불, 지급 정지 등 지급이 정상적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공민왕은 개혁 정치를 통하여 난국 타개와 국가 중흥을 위한 노력의 일부로서 녹제 쇄신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후기에 1 · 2품으로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20~30석에 불과하였으니, 그 이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녹봉은 고려 왕조 멸망 직전인 1391년(공양왕 3) 10월까지 지급되었다.
고려 말의 심각한 재정난은 이성계 일파의 신진 세력들이 전제 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게 된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사전 개혁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드디어 1391년(공양왕 3) 5월에 과전법(科田法)을 제정 선포함으로써 군국의 당면한 수요와 위기에 처해 있었던 녹봉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기능이 회복될 수 있었다.
고려 왕조는 멸망하였으나, 고려가 채택한 녹봉제의 이론적 근거는 조선 왕조에 계승되어 녹봉제의 기능이 다시 회복된 셈이다. 새로운 왕조의 새로운 토지 분급 규정이었던 과전법의 실시와 더불어 녹봉도 지급되었다. 1품에서 9품에 이르기까지 18과로 나누어 신진 관료들은 응분의 과전과 녹봉을 받게 되어 이원적인 생활 보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신진 관료들의 생활 보장책으로 토지와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는 고려의 옛 제도를 계승한 것이고, 더 멀리 소급하면 통일신라시대인 686년(신문왕 9)에 처음으로 관료전과 녹봉을 지급한 것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토지와 녹봉을 아울러 지급하는 대우 체제는 고려시대에 제도적으로 체계화되었고, 고려가 채택한 녹봉제의 이론적 근거는 조선 왕조에 계승되었다.
조선 왕조는 고려 말에 극도로 문란해진 전제를 개혁하고, 국고 수입을 증가시켜 신진 관료들에게 지급할 새로운 반록 규정을 재정하였다. 조선 조 최초의 반록 규정은 1~9품에 이르기까지 품계를 기준하여 18과등으로 구분한 초이번반록제(初二番班祿制)이다.
18과등의 초이번반록제는 1407년(태종 7)에 녹과 규정을 거쳐 1438년(세종 20)까지 시행되었다. 그 사이에 초창기의 검교록 · 치사록 등을 혁파하고 산관에게 녹봉 지급을 중단함으로써 세종 초부터는 실직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녹봉이 지급되었다. 품계는 높고 직위는 낮은 행직(行職)일 경우나 품계는 낮고 직위는 높은 수직(守職)일 경우 모두 실직에 따라 녹봉이 지급되었다.
실직의 품계를 기준하여 지급되는 정규반록 외에 실직이 아닌 검교록이나 치사록과 초창기의 봉군록 등은 본 품과에서 일정하게 가감하는 별도의 녹과 규정이 마련되었다. 녹과 규정은 점진적으로 개편되면서 시행되다가 검교록은 혁파되었고, 치사록은 일시 혁파되었다가 후에 봉조하록과(奉朝賀祿科)로 정비되었다.
봉군록과는 1395년(태조 4)에 공신 · 외척 봉군은 실직에서 1등을 내리도록 하고, 1402년(태종 2)에 외척 봉군은 종친 봉군보다 1등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1407년(태종 7)에 왕의 적자인 제1과 재내대군, 왕의 서자, 대군을 제외한 종실제군인 제2과 재내제군, 공신 · 부마제군 등 제3과 이성제군, 공신 · 외척 봉군 등 제4 · 5과 이성제군으로 일단 조정되었다.
1412년(태종 12)에 종친반록제가 별도로 제정되고, 1417년(태종 17)에 대군 · 종실제군 · 부마제군 · 이성제군 등 봉군록 녹과 전반에 걸쳐 새로운 세부 규정이 이루어졌다. 대군은 1과에 3석을 더하여 조선 녹제에서 최고록을 받도록 되었고, 종실제군과 부마제군은 다 같이 산계(散階)를 따르고, 이성제군은 실직을 따르도록 되었다.
외척제군은 1409년(태종 9)에 외척 봉군제가 폐지되고, 1414년(태종 14)에 돈녕부(敦寧府)를 설치하여 돈녕부록과가 별도로 상정되었다. 부마제군은 1444년(세종 26)에 부마 봉군제가 폐지되고, 의빈부(儀賓府)의 산계에 해당하는 녹과에 따라 받도록 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대군은 1과에 3석을 더하고, 종친은 종친부에서, 부마는 의빈부, 이성제군은 충훈부(忠勳府), 거리가 먼 왕친과 외척은 돈녕부에 소속되어 각각 해당 관부의 산계에 따른 녹과를 받도록 정비되었다.
검교각품록은 실직이 아닌 산직이므로 1394년(태조 3) 정월에 본 품과에서 3등을 내려 지급하는 규정이 처음 제정되었다. 급록 규정이 나타난 이후 검교산질(檢校散秩)의 혁파에 대한 논란이 빗발치는 가운데 본 품과에서 3등을 강등하는 처음 규정은 무너지고, 그보다 더 낮은 녹과로서 본 품과에 비교해서 4 내지 7 · 8과등을 강등하였다.
1415년(태종 15) 정월 이전까지 검교직에 기준을 두고 내시부(內侍府)와 동반 검교를 구분한 별도의 녹과를 6과등으로 설정하여 준행하였다가 1415년(태종 15) 정월에 내시부 · 동반 검교직이 새로이 개정되었다. 이때 개정된 녹과는 검교직을 기준하여 6과등으로 한 것은 전과 마찬가지이고, 전보다 받은 녹봉은 더 강등되어 본 품과에 비교하면 6 · 7과를 강등한 녹과였다.
그러나 1415년 6월에는 내시부와 동반 검교를 일원화시켜 오로지 품계를 기준으로 한 검교각품록과가 다시 제정되었다. 검교각품녹과는 검교록으로서의 최후의 것으로써 정1품에서 정 · 종6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과등으로 하여 본 품과에서 받은 녹봉은 대략 6 · 7과를 강등한 녹과였다.
최후로 정비된 검교각품록과는 1416년(태종 16) 6월에 내시부 검교를 제외한 일반 검교록에 대한 혁파 조처가 취해졌고, 그와 더불어 70세 이상 검교는 치사급록하는 제도가 나타났다. 1416년(태종 16)에 일반 검교에 대한 혁파 조처가 취해진 이후에도 내시부 검교는 물론 일반 유록 검교의 일부가 세종 초까지는 존속되었다. 검교 치사록은 1423년(세종 5)에 실직을 지내지 않은 검교 치사자에 대한 혁파 조처로 말미암아 소멸되고, 국초부터 내려오던 일반 치사록도 1429년(세종 11) 이후 1443년(세종 25) 이전 어느 시기에 혁파되었다.
1443년(세종 25)에 내시부 검교가 혁파됨으로써 모든 유록 검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혁파된 이후에 나타나는 검교직은 모두 유록 검교로서 특수 공훈에 대한 산직자 대우라는 원래 성격과는 다른 '검교거관(檢校去官)'이라는 퇴직자 대우 수단으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성종 초에 시행이 중단됨으로써 검교직 자체가 제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봉조청(奉朝請 녹과는 치사록이 혁파된 이후에 70세 이상인 자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옛 제도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1457년(세조 3)에 제정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봉조청이 봉조하로 명칭이 바뀌면서 수록 대상의 정원이 15명으로 제한되었다. 이것은 치사록이 혁파된 이후에 나타난 과거 치사록과 같은 성격의 녹과였다.
1407년(태종 7)에 경정된 녹과가 언제까지 시행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438년(세종 20) 7월에 호조에서 올린 계청(啓請)에 4맹삭반록제가 제정되기에 앞서 시행되었던 반록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1407년(태종 7)에서 1438년(세종 20) 사이에 녹제가 개편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때 개편된 녹과가 1438년(세종 20) 이전에 시행되었던 녹봉제이다. 이후 1439년(세종 21)부터 시행된 18과등의 4맹삭반록제(정월, 4월, 7월, 10월)는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조선의 녹봉제가 완비되었던 것인데 그 후 약 200여 년간 존속되면서 조선 녹봉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조선 녹봉제의 근간이라 할 4맹삭반록제가 정비되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관료층의 수적 증가와 재정난으로 녹봉 지급이 감축되는 사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이후 임진왜란 때 반록이 중단되고, 전시에 대응하는 임시 반록 규정으로 산료(散料)를 월봉으로 지급하는 규정이 제정되었다. 산료 지급 규정은 임란 이후 1601년(선조 34)에 다시 18과등의 4맹삭반록제로 환원되었으나. 녹봉 지급이 제대로 이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647년(인조 25)에 12과등의 4맹삭반록제로 바뀌고, 받는 녹봉도 크게 감축되면서 녹봉 지급이 현실화되어 갔다.
1647년(인조 25)에 실시된 12과등의 4맹삭반록제는 그 후 1670년(현종 11)과 1701년(숙종 27)에 개정되면서 12과등의 4맹삭반록제는 그대로 고수되었으나 녹액은 점진적으로 감소되었다. 1721년(경종 1)에는 13과등의 4맹삭반록제로 바뀌었다. 이때 실시된 13과등의 4맹삭반록제는 그대로 『속대전』에 반영되어 산료제(散料制)로 바뀌어 월봉으로 되었다. 그 후 1894년 갑오개혁 때 개정된 10품계에 따른 품봉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매월 지급하게 됨으로써 오늘날의 월급과 같이 변천하였다.
그리고 조선 녹봉제의 정비와 그 변동을 토지 제도의 변천 과정과 비교 검토하여 살펴본 결과 과전법이 1466년(세조 12)에 직전법으로 바뀌고, 1470년(성종 1)에 관수관급제에 따라 직전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직전세는 녹봉과 같은 성격으로 간주되었다. 1556년(명종 11)에 이러한 직전 지급마저 중단됨으로써 전조를 수취하고 녹봉을 지급받는 이원적인 대우 체제는 무너지고 녹봉만 지급하는 단일 대우 체제로 변천하게 되었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대우 체제는 ① 신라시대에 녹읍 → 관료전과 녹봉(歲租) → 녹읍, ② 고려시대에 역분전과 예식 → 전시과와 녹봉 → 녹과전과 녹봉, ③ 조선시대에 과전법과 녹봉 → 직전법과 녹봉 → 직전세와 녹봉 → 녹봉 → 산료(월봉)이라는 과정을 밟으면서 근대적인 봉급 제도로 변천되었다.
녹봉제가 16세기 중엽인 조선시대 1556년(명종 11)에 직전 지급이 중단되면서 녹봉만을 지급하는 단일 보수 제도로 변천하였다. 토지를 지급하여 수조권을 인정해 주는 봉건적인 보수 제도는 제도상에서 사라지고 현물을 지급하는 녹봉만이 관료들의 생활 보장 제도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물을 지급하는 녹봉제도 전근대적인 보수 제도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초이번반록제 역시 전근대적인 보수 제도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초이번반록제에서 미(米) · 속(粟) · 맥(麥) 등의 현물을 지급한 것부터 조선시대 녹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4맹삭반록제와 이후 『속대전』에 규정된 산료(월봉)에 이르기까지 현물을 지급한 녹봉은 근대적인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갑오개혁 때 개정된 10품계에 따른 품봉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매월 지급하게 된 월급이야말로 근대적인 봉급 제도로 이행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관료에 대한 대우 방법의 하나로서 정직 현관에게 지급되는 정규반록 외에 체아 수직자에게 지급되는 체아록이 있었다. 체아록은 정직 녹관이 아닌 체아 수직자에게 지급되는 녹봉으로서 도목과 번차 규정에 따라 교체되면서 입번(入番)하여 직사에 근무하는 재직 기간에 한해서 녹봉이 지급되었다. 지급 기준은 체아직의 품계에 해당하는 정규반록 규정을 적용받았는데 “체아는 아래 품계에 따른다〔아수하계(兒隨下階)〕.”는 원칙에 따라 같은 품계라 할지라도 정품이 아닌 종품에 준하는 녹과의 적용을 받았다.
이것은 체아록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으로 직사에 종사한 실적에 따라 수록하는 것이고, 녹관 체아, 예비 체아, 군직 체아의 경우는 직사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수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체아록은 실직주의를 고수하여 직무자(職務者)에 대한 생활 보장이라는 성격을 지니면서도 한편 공신, 한산미관자(閑散未官者), 행직당상(行職堂上) 등의 산관에 대한 대우책이라는 이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막연히 모든 산관에게 일률적으로 수록하게 한 것은 아니었고, 행직으로 낮은 품계나마 체아직을 수직하는 형태를 통해서 수록할 수 있었던 것인 만큼 직임이 없으면 녹이 없다는 녹제 운영의 실직주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한 것이다.
체아록은 고려 말부터 이어받은 첨설직(添設職)을 비롯하여 녹관의 수는 많고 녹봉의 재원은 부족하여 조선 초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체아직은 새로운 왕조가 새로이 관제를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창출해 낸 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체아록은 교체 근무하는 재직 기간에 한해서 지출되는 녹봉인 것이다.
체아록의 설정 경위는 세종 초에 녹관 체아가 혁파되면서 성중관(成衆官)으로 지칭되던 이전 체아(吏典遞兒)나 특수 병의 체아 수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전 체아가 중심이 되어 체아직이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신설된 특수병인 성중관의 체아 수직을 중심으로 제도화되었다.
특수병이 체아직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土), 대졸(隊卒), 팽배(彭排) 둥 시취(試取)에 의해 선발되는 병종은 조선 초에 녹봉 지급으로 우대 받다가 1445년(세종 27)부터 월봉으로 격하되었고, 그 후 이들이 체아직으로 제도화됨과 동시에 『경국대전』에서는 모두 체아록을 수록하도록 성문화되었다.
이렇게 체아록이 점진적으로 제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공상(工商) 천예들이 서반 체아의 수직을 통해 조반(朝班) 대열에 섞이게 되었다. 이에 1444년(세종 26)에 이들에 대한 양천의 신분적 구별을 확연히 하기 위한 제도적 조처로서 잡직 체아가 제도화되었다.
체아록의 등장과 더불어 1439년(세종 21)에 녹제를 개정할 때까지 정규반록 규정에 보이던 권무관록이 『경국대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오던 권무관록은 혁파되어 동서반 체아록으로 흡수된 듯하며, 고려시대 여러 관서의 이속 · 공장 · 잡기들이 근무한 날수를 기준하여 수록하던 잡별사와 공장별사는 조선시대 세종 초에 잡직 체아록으로 대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 체아수직 대상을 동반체아, 서반체아, 동서반 잡직 체아 등으로 대별하여 체계적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체아 수직 대상자들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지급되는 체아록의 지급 규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체아록의 지급 규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번차도목에 나타나 있다. 수적으로 가장 많고 또한 다양한 수직 대상을 포괄하여 체아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서반 체아였다. 서반 체아 및 서반 잡직 체아는 복잡하고 다양한 도목과 번차 규정을 설정하여 위로는 실직과 같이 4맹삭 연등수록하는 경우부터 아래로 근무 일수에 따라 월봉을 받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녹봉 지급 규정을 설정하였다.
반면에 동반 및 동반 잡직 체아의 지급 규정은 『경국대전주해』 번차도목에 보이지 않는다. 동반 체아는 도목 교체로 재직 기간에 한해 수록하게 되고, 동반 잡직 체아는 도목에다 번차 규정을 더 가하여 수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체아직의 녹봉 지급 규정을 설정한 것은 체아록의 정비가 체아 수직자들의 직능과 출신상의 신분을 엄격히 구별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산직 체계의 품관권무에게 지급된 권무관록을 동서반 체아록에 비정한다면, 이속 · 공장 · 잡기들에게 지급된 잡별사와 공장별사는 조선시대 잡직 체아에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체아직이 정비된 이후의 추이를 통해서 일반적인 동서반 체아 및 동서반 잡직 체아와 그 외 예비 체아, 군직 체아 등의 수록 실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체아직이 점진적으로 제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조선 초의 정규반록 규정이었던 초이번반록제가 1439년(세종 21)부터 4맹삭반록제로 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당상관뿐만 아니라 3품 이하의 산관도 크게 증가되었다. 이들은 실직을 받지 못하고 오래 지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체아록으로 집중되었으나 예비 체아로서는 그 충원이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세조 이래 행직의 남발로 산관의 수는 격증되었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예비 체아는 물론 서반제색 체아까지 차수(差授)하기에 이르렀다. 행직 당상관이 8 · 9품의 사용(司勇), 사맹(司猛)과 동오(同伍)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궁인(弓人) · 실인(失人) · 공장과 같은 잡직 체아까지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그 결과 갑사, 별시위 등 일반체아는 준직수록하지 못하고, 장용대(壯勇隊) 같은 경우는 면천위양으로 거관(去官)하면 족한데 녹봉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마저 나오게 되었다.
체아직의 남발은 연산군 때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군직 체아를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군직 체아는 예비 체아와 비슷한 성격으로 재상 및 조관(朝官)으로서 퇴관 후 귀속처가 없는 자를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군직 체아가 무분별하게 남발됨으로써 갑사, 별시위 등의 체아 수직에 가관(假官)이 오히려 실관처럼 행세하는 권력층의 농간마저 개입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정규반록이 실직주의 원칙으로 산관에 대한 생활을 보장하지 않고, 더구나 1466년(세조 12)에 직전법의 실시로 산관에 대한 토지 지급마저 중단되어 산관에 대한 대우책은 체아록으로 집약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목상 군직 체아를 받아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가관을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체아직을 설정한 기본 취지마저 무분별하게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 전기의 체아록은 제한된 관직 수로 많은 관원을 골고루 교체하여 근무시키는 동시에 무록 체아, 영직(影職) 체아 등 체아직을 통한 다양한 관직 운영의 묘법을 창안하여 국가 재정을 효율적으로 절감하면서 관직 운영에 효과를 거두는 데 공헌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