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태종 15)에 제도화된 섭육십(攝六十)의 후신으로 보인다. 대개 신분적으로 양인 또는 그 이하의 신량역천(身良役賤)들이 입속했으며, 이들은 시취(試取)에 의해 편입되었다.
시취 종목은 무술 시험은 치르지 않고 주(走)·역(力)을 측정하였다. 주는 소정의 규격을 가진 물병에 물을 담아 병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흐르도록 해놓고 물이 다 없어지는 동안에 달리기를 하여 그 주의 속도를 측정하되 270보 이상이면 1주, 260보를 2주, 250보를 3주라 하였다.
역은 완력(腕力)의 강도를 시험하는 것으로서 양손에 각각 50근씩을 들고 160보를 걸으면 1력, 130보를 걸으면 2력, 100보를 걸으면 3력이라 하였다. 이에 각각 3주·3력 이상을 받은 자만이 합격되었다.
대졸의 총원은 3,000인이었으며 5교대에 600인이 4개월씩 복무하였는데, 봉족(奉足)으로 1보(保)를 지급 받았다. 『경국대전』에 대졸이 광화문을 지키며 다른 병종들과 같이 입직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출직해 있는 동안의 대부분의 기간은 사령군(使令軍)으로 복무하였다.
따라서, 별시위(別侍衛) 등은 지위가 높은 마병(馬兵)인데 비해, 대졸은 중앙군의 다른 보병(步兵) 병종과 같이 입직(入直)·행순(行巡) 등 도성의 경비력을 보강시켜 주었다.
그들이 부담하는 군역의 내용이 요역화(徭役化)됨에 따라 현실과 괴리됨으로써 역졸화(驛卒化)되어 전투력 면에서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인원수로 보면 중앙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병종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