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년(숙종 2) 개성부(開城府)에 대흥산성(大興山城)이 축성되자 당상무관(堂上武官)이 파견되어 이를 관리하였다. 그 뒤 1680년에는 개성의 군무와 산성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관리영을 설치하고 김석주(金錫胄)로 하여금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대흥산성에 파견된 당상무관을 관리사로 승격시켜 현지의 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1684년에 훈련도감의 건의로 영종진(永宗鎭)이 어영청에 속한 예를 좇아 대흥산성도 훈련도감의 관할로 하여 훈국대장(訓局大將)의 통제를 받게 하자, 개성의 군무는 이중적인 지휘체계의 모순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1691년에 이르러 종래의 관리사를 개성유수가 겸하게 함으로써 개성의 군무를 일원화시켰다.
관원은 종2품의 관리사 1인, 대흥산성에 상주하는 정3품의 중군 1인, 종사관 1인, 별장 2인, 천총(千摠) 3인, 백총(百摠) 4인, 파총(把摠) 6인, 초관(哨官) 32인, 교련관(敎練官) 8인, 기패관(旗牌官) 36인, 당상군관 50인, 군관 250인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