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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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북한산성의 관리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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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북한산성의 관리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
내용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성되자 축성에 참가한 3군문, 즉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에서 감관(監官)을 파견하여 산성을 분담, 관리하도록 하는 조처가 있었다.

그런데 산성 안에 비축할 군량미가 5, 6만석이나 되어 그것을 썩지 않게 보관하면서 산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담관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아, 이듬해에 경리청이 산성 안에 설치되었다.

당시의 경리청은 활동이 활발하여서 군수미 확보면에서도 3군문의 보미(保米) 외에 환곡 및 조지서(造紙署)에서 제조한 지류의 판매를 통한 수익활동으로 재력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경종 이후 혁파논의가 자주 대두되어 업무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결국 1747년(영조 23) 군영체제의 재정비로 총융청(摠戎廳)에 합속되었고, 그 뒤 1891년(고종 28)서울의 방비에 중요한 북한산성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이미 통위영(統衛營)에 속해 있던 총융청군을 분리하여 경리청을 다시 설치하였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다.

관원으로는 영의정이 겸임한 도제조(都提調) 1인, 제조(提調) 1인, 비변사 낭청(郎廳)이 겸임하는 낭청 1인과 따로 현지에 북한관성장 1인, 파총(把摠) 1인 및 초관(哨官) 5인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집필자
안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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