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창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전기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였던 관청.
목차
정의
고려전기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였던 관청.
내용

좌창(左倉)은 국용을 담당하였던 우창(右倉)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재정기구였다. 『고려사』에서 좌창이라는 이름은 1066년(문종 20) 4월에 처음 보이지만 태조 때부터 관료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녹봉을 담당한 관청 역시 고려 초기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문종 때 정치제도가 정비되면서 좌창도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고려사』 오행지에 1015년(현종 6) 3월 우창의 용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좌창 역시 늦어도 현종 때까지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 녹봉 서문에 따르면 녹봉제가 정비된 문종 때에는 매년 좌창에 들어온 쌀[米]·조[粟]·보리[麥] 13만 9736석(石) 13두(斗)를 가지고 녹봉을 지급하였다. 좌창에서 매년 관리들의 녹봉으로 지급한 곡식은 군현(郡縣)의 민전(民田)에서 거둔 전조(田租)[전부(田賦)]로서 각지에 설치된 조창(漕倉)을 통해 좌창으로 조운(漕運)된 것이다.

1066년 좌창을 비롯한 우창·용문창(龍門倉)·운흥창(雲興倉) 등 국가의 중요 재정기관의 책임자인 별감(別監)을 왕 측근인사인 근시(近侍)[내시(內侍)]로 임명한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고려 전기 중요한 재정기구의 운영에 왕의 영향력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증거이다. 한편 고려 전기 좌창을 비롯한 중요한 창고에서 창곡을 출납(出納)할 때에는 어사대(御史臺)의 관원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이 감찰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좌창 등의 중요한 재정기관의 운영에 왕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고려 전기 좌창에는 우창과 마찬가지로 산직장상(散職將相) 2명을 간수군(看守軍)으로 두어서 경계하였다.

변천과 현황

좌창은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한 후 광흥창(廣興倉)으로 이름을 바꾸고, 근시로 임명되었던 별감 대신 사(使) 1명(정5품)과 부사 1명(정6품)을 비롯하여 승(丞) 1명(정7품)을 두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광흥창의 책임자로 별감 대신 정식 관리인 품관(品官)으로 사와 부사를 둔 것이다. 이것은 고려 전기에 좌창별감에 근시를 임명하여 좌창의 운영에 왕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던 것과 다른 것이다. 이것은 충선왕 복위 후 좌창을 비롯한 국가 중요 재정관청의 관리와 운영을 공적으로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공민왕 때에는 사의 품질을 종5품, 부사는 종6품, 승은 종7품으로 낮추고, 종8품의 주부(注簿)를 더 두었다. 충선왕 때 정해진 광흥창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전기의 재정구조』(안병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박종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고려·조선시대 녹봉제연구』(최정환, 경북대학교출판부, 1991)
「고려시대의 경창(京倉)」(김재명, 『청계사학』 4, 청계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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