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관직에는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이 있었다. 실직은 녹관과 무록관으로 대별된다. 무록관은 경관직(京官職)뿐 아니라 외관직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경관직에는 의금부의 당하관을 비롯해 교서관(校書館)·사옹원(司饔院)·상의원(尙衣院)·군기시(軍器寺)·예빈시(禮賓寺)·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설사(典設司)·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내수사(內需司)·소격서(昭格署)·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도화서(圖畫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 등 각 관서의 제거(提擧, 정3품당하)·제검(提檢, 정4품)·별좌(別坐, 정5품)·별제(別提, 정6품)·별검(別檢, 정8품) 등이다.
외관직에는 경기좌도·우도수군판관(종5품)과 찰방(종6품)·교수(敎授, 종6품)·훈도(訓導, 종9품)·심약(審藥, 종9품)·검률(檢律, 종9품)·역승(驛丞, 종9품)·도승(渡丞, 종7품)이 모두 무록관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무록관은 경관직 정3품당하관부터 종8품까지, 외관직은 종5품부터 종9품까지 광범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록관은 고려시대부터 영직(影職)·첨설직(添設職)·검교직(檢校職)과 더불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관직 체계 및 녹봉 제도와 관련되어 제도화된 것은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시기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세조 이전의 실록에는 무록관이라는 관직 체제가 나타나지 않고, 세조 이후 성종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령의 포폄(褒貶)과 관련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즉, 수령고과(守令考課)에 있어 이중자(二中者)는 무록관에 서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무록관인 별좌·별제 등이 수령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상당히 눈에 띈다.
별좌·별제 등의 관직명은 태종조부터 각 아문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 당시는 무록관이라는 관직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녹을 받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렇게 무록관 제도가 세조 이후에 확립된 것은 양반의 신분 유지와 국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녹봉 지급을 줄이기 위해 나타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양반의 신분으로 과거에 의해 등용되거나 음사(蔭仕)하게 되면 관로(官路)가 보장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무록관으로라도 관로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양반의 입장으로서는 자신의 신분 유지와 경제적 보장을 위하여 무록관의 길이라도 찾아야 하였다. 한편, 국가적 입장에서는 재정 궁핍에 따른 경비 절감의 일환으로 유록관(有祿官)을 무록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