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는 고려전기 장흥진 등에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외교가이다. 942년(태조 25)에 태어나 998년(목종 1)에 사망했다. 96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두루 관직을 거쳐 최고직에 이르렀다. 972년 직접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십수 년 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993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물리쳤고, 이 담판에서의 약속을 토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 · 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쳤다.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 · 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 수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한 뒤,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동조하자 성종(成宗)도 찬성하였다. 이때 소손녕도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해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으로부터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받자,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러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해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서희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했을 때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해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海州)에 갔을 때 임금이 서희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至尊)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일곱 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그러나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 서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서희가 996년(성종 15)에 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해 어의 한 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서희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