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선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등이 대동강에 용선을 띄우고 노닐다가 영명사에서 휴식을 취하며 헌향하고는 하였다. 특히 예종은 1109년(예종 4) 4월에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하였고, 5월에는 절의 중창을 명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영명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 36본사의 하나가 되었다. 1663년(현종 4)에는 총섭(摠攝) 자평(自平)이 당우(堂宇)를 모두 중수(重修)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구관(句管)이 득월루(得月樓)를 보수하였다. 이후 청일전쟁으로 몇 칸의 당우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버린 것을 1894년(고종 31)에 다시 지었다.
1911년 영명사는 서도(西道)의 본산이 되었고, 1920년에는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영명사와 이 절에 소속된 말사들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고 칠조(七祖)가 전수한 종의(宗義)를 이어가는 것을 규범으로 삼았다. 이때 용반(龍般)이 주지로 취임하여 수년 동안 사찰을 일신(一新)하였으며, 1922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고 당우 및 요사채(寮舍채)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31본산이던 시절 영명사는 16개의 말사를 총괄하였다. 대동군의 광법사(廣法寺) · 법운암(法雲庵) · 영천사(靈泉寺) · 두타사(頭陀寺) · 중화군의 옥천사(玉泉寺) · 심곡사(深谷寺) · 수락암(水落庵) · 은구사(殷口寺) · 용산사(龍山寺) · 길상사(吉祥寺) · 고봉사(高峯寺), 용강군의 보림사(寶林寺) · 용천사(湧泉寺) · 신덕사(神德寺) · 회용사(洄湧寺) · 일운암(日雲庵)이 당시 영명사의 말사였다.
영명사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 절에는 팔각석조불감과 팔각오층탑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영명사가 소실되면서 석조불감은 용화사로 옮겨졌다. 지금은 부벽루와 팔각오층석탑, 만경대 구역에 부속 암자인 법운암만 남아 있다. 영명사 자리에는 요양원이 들어서 부벽루까지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