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明朗)의 자는 국육(國育)으로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며,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 김씨이자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 명랑의 두 형은 국교대덕(國敎大德), 의안대덕(義安大德)이다.
명랑은 632년(선덕왕 1)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밀교(密敎)의 비법을 배우고 3년 만에 귀국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주(神呪)편에 따르면, 명랑은 귀국하는 길에 해룡(海龍)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1,000냥을 시주받아 귀국하였다고 한다. 신라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집을 헐고 절을 창건하였다.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절의 탑상(塔像)을 장식하였더니 그 광채가 매우 찬란하였으므로 그 절을 금광사(金光寺)라 하였다고 한다.
삼국이 통일된 후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는 새로운 전운이 일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 있던 당나라 군사들을 정벌했는데, 당나라의 설방(薛邦)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의상(義湘)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 조정에서는 명랑에게 비책(秘策)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도량(道場)을 개설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가 이미 국경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명랑은 풀로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만들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어 유가명승(瑜伽名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썼다. 그러자 당나라 전함은 신라와 교전하기도 전에 사나운 풍랑으로 침몰되었다. 그 뒤에도 당군이 침략을 시도하면 명랑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격퇴시켰다. 명랑이 썼다는 문두루비법은 『관정경(灌頂經)』과 『금광명경(金光明經)』의 가르침에 따른 밀교의 의례였다. 671년에 당나라 군사가 다시 신라를 공격했을 때 명랑은 다시 문두루비밀법을 써서 그들을 물리쳤다. 그 후 명랑은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이름 붙였다.
명랑의 뒤를 이은 고승으로는 안혜(安惠) · 낭융(朗融) · 광학(廣學) · 대연(大綠) 등 4명의 대덕[四大德]이 있다. 광학과 대연은 고려 태조를 따라 개경으로 가서 향을 피우며 수도하였고, 태조의 청으로 문두루비밀법을 써서 해적을 소탕하였다. 경주의 원원사(遠願寺)는 이 4명의 대덕과 관련이 있다. 이후 명랑은 신인종의 종조(宗祖)로 인식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 현성사(現聖寺), 천마산 총지암(總持庵), 모악산 주석원(呪錫院) 등이 신인종의 종찰(宗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