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종(神印宗)은 신라 문무왕 때 등장하여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였던 불교 종파이다. 그 중심 사상이 되는 밀교는 5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시기에 인도에서 출현하여 7세기에는 사상과 실천체계가 확립되었다. 밀교는 8세기에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에 의해 당의 불교계에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으나, 하나의 종파로서 체계와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구카이[空海]가 창건한 진언종(眞言宗)을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밀교가 하나의 종파로서 확고한 위상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기존의 밀교 연구는 종파의 개념, 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와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편의적으로 종파를 언급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신인종의 경우에도 대체로 신라 성립설과 고려 성립설로 나누어져 있으나 뚜렷한 역사상을 해명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신라의 밀교는 선덕여왕 때의 밀본(密本)을 비롯하여 명랑(明朗)과 혜통(惠通)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이 가운데 명랑이 당에 건너가 밀교를 전수하고 돌아왔으며, 삼국 통일 후에 당의 군대가 신라를 침공하였을 때에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의 침략 격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명랑은 금광사(金光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어서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는 안혜(安惠)와 낭융(朗融)이 신라 왕실과 김유신 후손의 지원을 받아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명랑신인(明朗神印)’조의 기사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에 해적이 와서 소요하므로 안혜·낭융의 후예인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을 청하여 진압할 법을 짓게 하였고, 현성사(賢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거지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해적이 소요하였던 때는 932년(태조 15)에 후백제 견훤의 수군이 예성강 일대를 공략하였던 시기로 보이며, 진압할 법이란 태조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문두루 도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현성사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한 936년(태조 19)에 신인종의 중심 사찰로 개경에 창건되었다.
고려시기의 신인종은 화엄종, 법상종, 선종, 천태종과 같은 주요 종파에 비해 소수 종파로 존재하였으며, 종파의 활동이나 주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적다. 다만, 현성사에 고려 국왕이 행차하거나 불교 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74회 정도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현성사 관련 기록은 몽골 침략기에 해당하는 고종 때에 39회나 집중되어 있는데, 이 시기 신인종이 외적 침략에 대비한 국가 불교적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1074년(문종 28) 사천왕사에서 27일간 문두루 도량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외적의 침략을 대비해 동경(東京), 동계(東界), 서경(西京) 지역에서 문두루 도량을 설행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결국 고려시대 문두루 도량이 국가 수호와 왕권 강화를 목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신주(神呪)」편이라는 밀교 관련 편목이 따로 설정될 만큼 신라 중대에는 불교계에서 밀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신인종은 종파로서 뚜렷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고려시대의 신인종은 현성사 외에 개경, 서경, 동경, 동계 등에 소속 사찰이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전국적인 범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인종은 군소 종단으로서 존재하였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표적 인물도 거의 없다. 신인종은 조선 초인 1406년(태종 6년)에 11개 종파의 하나로 존재하였으나, 다음 해에 7개의 종파로 통폐합되면서 중도종(中道宗)과 통합되어 중신종(中神宗)이 되었으며, 1424년(세종 6)에 교종으로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