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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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중국에서 선을 배워 최초로 중국인을 교화한 신라 승려.
이칭
송계(松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80년(문무왕 20) 혹은 684년(신문왕 4)
사망 연도
756년(경덕왕 15) 혹은 762년(경덕왕 21)
출생지
통일신라
관련 사건
안사의 난, 회창폐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무상(無相)은 남북국시대 신라 출신으로 중국에서 선을 배운 정중종(淨衆宗)의 개조이다. 그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지선(智詵)과 처적(處寂)으로부터 선(禪)을 배웠고 사천성 정중사(淨衆寺)를 중심으로 선풍을 날려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무상의 선풍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티베트와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의
남북국시대, 중국에서 선을 배워 최초로 중국인을 교화한 신라 승려.
주요 활동

당 현종은 무상을 협서성에 있는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상은 번잡한 수도를 떠나 옛 촉나라 땅인 자중(資中)으로 가서 지선(智詵)의 밑에서 선(禪)을 배웠다. 그 뒤 사천성 덕순사(德純寺)의 당화상(唐和上) 처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으나 처적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무상은 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을 해 처척에게 배움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처척의 지도를 받아서 선과 두타행(頭陀行)을 익히게 되었다. 이후 처척은 무상에게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하사받은 마납구조의(磨納九條衣)를 물려주었다.

무상은 천곡산(天谷山)에서 좌선과 두타행을 실천했다. 그는 한번 좌선을 시작하면 5일 동안 계속 좌선을 하였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도 바위에 앉아 수도하였고, 밤중에도 자리를 이탈하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무상은 낮에는 무덤가에서 밤에는 나무 밑에 앉아 고행하며 정진하였는데, 그를 존경한 많은 사람들이 묘원 한쪽에 정사(精舍)를 지어 주고 머물게 하였다. 당시 익주(益州) 장사(長史) 장구 겸경(章仇兼瓊)이 찾아오기도 하였으며,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촉(蜀)에 들어온 현종이 무상을 내전에 맞아들여 예배하기도 하였다.

무상을 시기한 현령 양익(楊翌)은 그의 도력을 시기하여 20여 명의 무뢰한을 시켜 그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현청 안으로 모래와 자갈, 큰 돌을 동반한 바람이 몰아치면서 장막 등이 뒤집혔다. 이에 양익이 뉘우치고 사죄하자 바람이 멈추었는데, 이때부터 양익은 무상을 도와 정중사(淨衆寺) · 대자사(大慈寺) · 보리사(菩提寺) · 영국사(寧國寺) 등을 지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무상은 사천성 정중사(淨衆寺)에 20여 년을 주석하며 수행하였다. 이에 무상을 정중종(淨衆宗)의 개조라고 한다. 그는 이곳 정중사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절에는 나무를 하는 일꾼이 있었는데, 하루는 무상이 “손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니 옆에 있겠다.”라고 하였다. 무상은 본국 신라로부터 자객이 와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천장에서 큰 물체가 떨어지더니 자객이 일꾼의 칼에 맞고 죽었다. 일꾼은 죽은 자객의 시체를 산문 밖 구덩이에 묻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또한 무상은 제자들에게 절 앞마당의 큰 떡갈나무를 가리키면서 '머지 않아 이 나무와 탑이 변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841년 무종이 폐불(癈佛)을 단행하였는데 절은 무사하였으나 나무와 탑은 쓰러졌다고 한다. 무상은 절 앞에 있는 2개의 연못을 가리켜 '왼쪽의 것은 국이요, 오른쪽의 것은 밥'이라고 하였다. 시주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 이 연못의 물을 뜨면 반드시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무상은 756년 또는 762년 즈음에 입적한 것으로 전한다. 『송고승전』에는 무상이 입적한 시기를 756년(至德 1)년 그가 77세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법보기』에는 762년(보응 1)년 무상이 79세 때 입적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어느 날 무상이 제자 무주(無住)를 떠올려 그를 불렀으나, 무주가 오지 않자 비밀리에 공인(工人) 훈선(薰璿)에게 신의(信衣)와 17종의 다른 옷을 보내며 부탁하고 맡겼다고 한다.

무상이 죽은 뒤 무종은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그 때 정중사의 대종(大鐘)을 강 건너 대자사로 옮겼고, 선종 때는 대종을 다시 정중사로 옮겨 왔다. 이를 옮기기 위해서는 이틀이 걸리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순식간에 종을 이전할 수 있었다. 종을 옮기는 일을 주관했던 승려가 무상의 사리탑(舍利塔)에 참배를 하러 갔더니 그 탑에 많은 땀이 배어 있었다. 사람들은 백 년 전에 죽은 무상이 도와서 종을 쉽게 운반한 것임을 깨닫고 무상을 더욱 존경하였다. 후인들은 이 사리탑을 동해대사탑(東海大師塔)이라고 불렀다.

학문과 사상

무상은 중국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독자적인 선풍을 펼쳤다. 그는 '기억을 없게 하고[無憶] 생각을 없게 하고[無念] 망령하지 않아야 한다[莫忘]'라는 삼구어(三句語)를 각각 계(戒) ‧ 정(定) ‧ 혜(惠) 삼학에 대입하였다. 또한 소리를 끌어 염불하기[引聲念佛]를 권하는 등 독자적인 선풍을 가지고 대중 교화를 실현하여 정중종(淨衆宗)이라는 독자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무상의 선법이 전승된 기록은 자료마다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종의 노력 때문이다. 『역대법보기』에서는 무상의 제자로 무주(無住)를 들고 있으며, 『송고승전』에서는 그의 제자로 정중 신회(淨衆神會 720~794)를 들고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무주와 신회를 포함한 5명을 무상의 제자로 들고 있다. 또한 종밀(宗密)이 쓴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에도 무상에게 여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무상의 선풍이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상의 선론은 티베트까지 전파되었다. 중국에서 무상이 가진 높은 위상은 신라에도 알려졌다. 범일(梵日)의 법을 이은 행적(行寂 832~916)은 입당하여 순례하던 중에 875년에 정중사의 무상 영당을 참배하고는 같은 신라인인데 시대가 달라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그 자취만 찾게 되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또한 최치원은 중국에서 교화를 펼친 이로 상산 혜각(常山慧覺)과 함께 무상을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라 출신으로 큰 활약을 한 무상의 행적이 신라에도 알려졌던 정황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원전

『송고승전(宋高僧傳)』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
『신승전(神僧傳)』

단행본

鄭性本, 『新羅禪宗의 硏究』(민족사, 1995)
이기영, 『종교사화』(한국불교연구원, 1978)

논문

김진무, 「淨衆宗의 法系와 그 禪思想」(『韓國禪學』 44, 2016)
김훈, 「中國禪宗과無相禪師」(『佛敎硏究』 23, 2005)
정병삼, 「신라 구법승의 구법과 전도-圓測과 義相, 無相과 道義를 중심으로-」(『佛敎硏究』 27, 2007)
차차석,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禪文化硏究』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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