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문호왕 법민조(文虎王 法敏條)에 기록된 건립 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가사(假寺)를 사천왕사로 고쳐짓고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 경 이미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된 바 있으나 전제적인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경주 시내 동남쪽에 위치한 경주 낭산 일원(사적, 1968년 지정) 남단의 낮은 언덕(해발 약 53m)에 위치한 절터이다. 주변에 경주 선덕여왕릉(사적, 1969년 지정), 능지탑, 보문리사지, 전 황복사지, 전 신문왕릉 등이 있고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경주 망덕사지(사적, 1963년 지정)가 있다. 현재 사역에는 동서방향으로 초석을 남긴 사방 3칸의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어 쌍탑식(雙塔式) 가람(伽藍)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북쪽에 동서방향으로 사방 3칸 규모의 작은 건물 기단(일명 단석지, 불교의식공간으로 추정)이 있다. 외곽에는 머리가 없어진 동서 귀부와 당간지주가 1기 있다. 이밖에 최근 발굴 조사로 확인된 회랑지·익랑지·석등지·귀부 비각·북편배수로·석교가 있고, 일제가 가설한 철도로 파괴된 강당지가 일부 드러나 있다.
탑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방형으로 중앙에 방형의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이 있다. 기단은 가구식전석축기단으로 사방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고, 지대석 중간 중간에 얕은 장방형의 홈을 파고 탱주를 세웠다. 기단 모서리에 사방 50㎝되는 방형의 얕은 단을 만들고 그 중앙에 홈을 파서 우주를 고정시켰다. 우주와 탱주 옆에는 넝쿨무늬가 있는 장방형전을 쌓아올리고 이 전으로 구획된 면에 녹유소조상을 부착하였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단은 전면에 2개, 좌우에 1개씩 설치되어 있다. 금당지 중심부에는 원형대석 사이에 방형대석이 놓여 있다. 단석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방형 건물지이다. 초석 중앙부에 지름 22㎝, 깊이 23㎝의 원형구멍이 있고, 그 주변에 약 55㎝ 크기의 방형을 이중으로 모각하였다. 익랑지의 초석은 모두 없어졌지만 금당 좌우에서 뻗어나가 회랑과 직각으로 이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도리칸 9칸, 보칸 1칸으로 주칸 거리는 약 2.6m로 거의 등간격이다. 서회랑지는 도리칸 28칸, 보칸 1칸으로 단랑구조이며 현존하는 남북 거리는 80m 정도이다. 동회랑지는 북편의 철로에 의해 일부 결실되었다. 남회랑지는 문지 동편에서만 도리칸 11칸, 보칸 1칸으로 확인되었다.
금당지 북쪽 사방 3칸 규모의 방형 건물지, 일명 ‘단석지’는 통일신라시대 쌍탑가람배치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지이다.
통일신라 초기에 지어진 최초의 쌍탑식 가람이자 2기의 목탑을 나란히 배치한 첫 사찰이며, 목탑 기단부의 면석이 녹유소조상이었으므로 당시의 건축·미술·불교문화사를 연구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