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인각사지는 화산(華山: 760m) 최북단 기슭, 위천(渭川)변의 퇴적지에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흥현」조에 “인각사는 화산에 있으며, 동구에 바위 벼랑이 우뚝한데, 옛 말에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으로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사찰 경내는 좁고 좌우측에는 넓은 평지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경내에는 최근 해체 · 보수된 극락전과 요사 2동, 명부전, 국사전, 미륵전, 산령각, 일연선사 생애관,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보물, 1965년 지정)가 있다. 보각국사탑비는 1153년(의종 7)∼1155년 사이에 죽허 스님이 왕희지 글씨를 모아 세웠지만,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과 청진당, 두 분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인각사는 643년(선덕여왕 1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번성하여 고려시대에는 국존(國尊 : 국사) 일연(一然) 스님이 1284년(충렬왕 10)부터 임종할 때까지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이 당시 인각사는 구산문의 도회(都會)를 개최할 정도로 사세(寺勢)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성화(性和) 스님이 화주(化主)를 맡고 배흥일(裵興逸)이 시주하여 대웅전 · 극락전 · 승방 · 종루 등이 다시 갖추어지는 중수가 이루어졌다.
1991년과 1992년 2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基壇部)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99년에는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에서 사역확인을 위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역이 대략적으로 확인되었다. 2007년 10월부터 (재)불교문화재연구소(현, 불교문화유산연구소)에서 총 5차례에 걸쳐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2008년 10월 5차 발굴 당시 미륵당 부근에서 불교의식구인 금동병향로(금동으로 만든 자루 달린 향로), 청동향합(청동으로 만든 향 담는 그릇), 청동정병(청동으로 만든 물병), 청동이중합(청동으로 만든 두겹 그릇), 청동반자(청동으로 만든 북) 등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또한 미륵당터 주변과 인각사 앞 도로를 따라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가 다수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다수의 건물이 밀집되고 그 앞으로 회랑이 중첩되어 있어 양주 회암사지나 춘천 청평사처럼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최소 3개 이상의 별원(別院)으로 구성되었던 대규모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일연스님이 주석하기 전까지 인각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고려시대 이전 인각사는 사세가 미미했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던 거대한 사찰로, 그 규모는 당시 수도였던 경주지역을 제외한 지방사찰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연스님의 하안소(下安所)로, 만년을 보내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입적한 곳이자 일연 스님을 위해 조성된 보각국사비와 보각국사탑이 남아 있어 불교사와 미술사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