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내려가는 중간에 위치한 숲이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주위는 습지이다.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0년(탈해왕 4)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光明)으로 차 있어 가보니 자주 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脫解王)에게 고(告)하자 왕(王)이 거동하여 궤(櫃)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고 한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太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王位)를 파사(婆娑)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金櫃)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姓)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6대손인 미추(未鄒)가 김씨로서는 최초로 신라 왕이 되었다.
하늘에서 자주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거나 알[卵] 대신에 금궤(金櫃)가 등장한 것 등을 보면 계림(鷄林)의 김알지신화(金閼智神話)는 천손강림설화(天孫降臨說話)이자 난생설화(卵生說話)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알지탄생일(金閼智誕生日)이 65년(탈해왕 9)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약간 다르지만 시림(始林)에서 태어난 알지(閼智)의 기록은 같다. 시림(始林)은 신라(新羅)의 신성림(神聖林)이었고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모두 위와 같은 내용의 기록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계림에는 약 100여 주의 고목(古木)이 우거져 있으며 1803년(순조 3)에 세운 비가 서 있다.
계림(鷄林)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붙여진 것인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名)」의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계림(鷄林)”이라는 문자(文字)나 박제상(朴堤上)이 왜왕(倭王)에게 “계림(鷄林) 운운(云云)”하는 점, 당서(唐書)인 『백거이전(白居易傳)』의 ‘계림(鷄林)’을 비롯하여 송대(宋代)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오식(吳植)의 『계림지(鷄林誌)』, 왕란(王亂)의 『계림지(鷄林誌)』 등 여러 예를 감안해 볼 때 ‘계림(鷄林)’은 신라의 국명(國名)으로도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