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월성은 신라의 왕궁을 보호하는 왕성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다. 월성은 경주 분지의 중심부 남쪽에 위치하는데, 남천 북안의 소규모 단독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월성의 전체 둘레는 2,340m이며, 내부 면적은 207,528㎡이다. 동서의 길이는 890m, 남북의 길이는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이다. 이러한 성의 외형적 특징 때문에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월성과 해자에서 ‘재성’명 와당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경주 역사 유적 주4의 일부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삼국사기』 이후, 경주 월성에 대해 다양한 기록들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37년(혁거세 거서간 21)에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는 기록과 기원전 32년(동왕 26)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금성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중국 사서와 금석문에서도 확인되는데, 482년(소지 마립간 4)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서 금성은 왕경(王京) 자체를 의미하거나, 별개의 왕성을 지칭한다.
경주 월성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101년(파사 이사금 22)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 기록들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금성과 월성은 구분되는 성이고, 월성 축조 이전에 다른 궁성이 존재하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금성이 신라 왕도를 지칭한다는 견해와 월성의 이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금성과 월성을 구분하여 월성 이외의 초기 궁궐을 상정한 의견도 있다. 월성과 다른 별개 궁성의 존재를 인정한 견해에서도 위치의 주5에는 차이가 있다. 고려~조선시대의 경주 읍성(慶州邑城) 자리로 보는 견해와 읍성을 포함하여 동쪽으로 전랑지(殿廊址) 서편에 이르는 알천(閼川) 이남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읍성 부근으로 알천 및 형산강과 인접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와 알천 북쪽의 황성 공원 일대로 파악하거나 월성의 남쪽이자 남산 북쪽 기슭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삼국사기』에는 101년(파사 이사금 22)에 월성을 쌓고, 왕의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궁성인 월성 축조 후에 금성에서 왕성을 옮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월성 내외부의 건물로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 내황전(內黃殿), 주7, 평의전(平議殿), 서란전(瑞蘭殿) 등의 전각이 확인된다. 그리고 주6, 망은루(望恩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등의 누각 시설과 주8, 천존고(天尊庫)와 같은 창고 건물 등의 명칭이 보인다. 이러한 건물들이 모두 월성 내부에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왕궁 혹은 주변의 부속 시설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조에 월성은 101년(파사 이사금 22)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과 같기 때문에 월성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라고 하며, 토축의 둘레가 3,023척이라고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월성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전한다. 290년(유례 이사금 7)에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 마립간 9)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월성 안에는 남쪽과 북쪽에 귀정문(歸正門) · 북문(北門) · 인화문(仁化門) · 현덕문(玄德門) · 무평문(武平門) · 준례문(遵禮門) 등의 성문과 월상루(月上樓) · 망덕루(望德樓) · 명학루(鳴鶴樓) · 고루(鼓樓)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신하들의 주1를 하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 삼궁(三宮: 大宮 · 梁宮 · 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현재 월성 내부에는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월성 내부로 옮겨서 축조한 석빙고가 남아 있다.
1914년부터 지금까지 월성과 내외부에서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914년에 남벽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1979~1989년에 현재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전신인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에 의해 진행되었다.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은 동문지와 동벽, 성 외부에의 석축 해자 등을 확인했다.
1990년부터는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해자는 북벽 외곽 서쪽부터 석축 15호 해자와 가장 동쪽의 석축 해자로 구분된다. 석축 해자의 하단부에서는 기반층을 주9 수혈 해자가 확인되었다. 수혈 해자가 매몰된 이후에 상부에 6개소의 독립된 형태의 호안 석축이 있는 석축 해자가 조성되었다. 각각의 해자는 입수구와 출수구로 서로 연결된 상태이고, 24차례에 걸쳐 보수된 흔적이 확인되었다. 석축 해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가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9~10세기경에 월성의 사용이 중단되면서 함께 폐기되었다.
기록과 발굴 조사를 통해 월성의 내외부에서는 궁궐 혹은 관청과 관련된 다수의 건물이 배치되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월성 외곽 건물지는 해자 주변에서 다수 확인되어 월성의 관리와 관련된 관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월성 내부는 A~D 지구로 나누어 조사가 진행 중인데, 이 중 C 지구에서는 월성 폐기 직전까지 사용된 17동의 건물지가 계획적으로 배치된 것이 파악되었으며, 하부에는 선대의 건물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3세기를 전후하여 10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동벽과 서벽 등에서 월성 성벽의 절개 조사가 진행되었다. 성벽은 기반암을 정지한 뒤 기초를 성토하고, 점토, 소토, 석회 등 물성이 다른 토제로 주10 성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토를 얇게 깔아 마무리하고 상부에 석재를 무질서하게 올려 토성의 유실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된다. 기저부 조성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하여 4세기 중엽에 기초부가 조성되었고 5세기 초반에 월성이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의 축조 및 사용 시기 등에 대해서는 3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까지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데, 고고학적인 조사에 근거한다면 월성의 초축 시기는 5세기를 전후한 것이 되므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이에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마립간 시기의 내용을 부회하여 사로국(斯盧國) 단계의 초기 기사에 월성의 존재가 기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4세기에 본격적인 월성 축조 이전에 월성 내 자연 구릉에 별개의 주3가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경주 월성은 신라 초기에 축조되어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왕성이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처럼 경주 월성은 핵심적인 도성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