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의 정확한 초축 시기를 언급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병지 성보 조에서 1012년(고려 현종 3)에 경주, 장주, 금양, 궁올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이 시기에 읍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통지』 권6 성지 조에는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무오년, 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 남문은 징례문이고, 동문은 향일문이고, 서문은 망미문이고, 북문은 공신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378년(고려 우왕 4)에 경주읍성이 개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대(1418~1450)에는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읍성의 개축이 진행되었다. 이때 읍성의 입지와 축조를 위한 표준화가 시도되며, 기존의 토성을 석축화하거나 해당 지역의 민호 수에 따라 읍성의 규모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경주읍성이 다시 개축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경주읍성도 동일한 기준에 따라 수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실록』에는 1451년(문종 1)에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도체찰사 정분이 3도의 읍성을 심정한 후, 계를 올린 내용에서 "경주부 읍성은 옛 모습처럼 둘레 4,075척, 높이 11척 6촌이고, 여장의 높이 1척 4촌, 적대 26개소, 문 3개소, 옹성은 없으며 여장이 1,155첩, 우물 83개소, 해자는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여기서 조선 전기 경주읍성의 규모와 외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문종실록』에 실린 1451년(문종 1) 9월의 기록에 해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세조실록』에서는 해자의 존재가 확인된다. 1467년(세조 12) 정월에 경주 북천의 물길이 읍성을 향하여 곧바로 향해 있다는 점에서 읍성 하단의 해자가 모두 메워지고 막혀서, 제방과 해자를 수축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1451~1467년 사이 어느 시점에 경주읍성에 해자가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경주읍성이 파손되었다.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 성곽 조에는 “징례문은 읍성의 남문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숭정 임신년에 부윤 전식이 중수하였으며, 나머지 동 · 서 · 북쪽에 위치한 삼문을 차례로 보수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에 경주읍성의 중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전국적인 성곽 개수가 다시 진행된다. 『부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1744년(영조 20) 10월에 경주부윤 정홍제가 경주 부성을 개축하였고, 이 시기에 남문의 누각도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54년(영조 30)에는 경주부윤 홍익삼이 내아와 일승정 · 함벽정을 신축하고, 세금당 · 금학헌 · 이요당을 중수하였다. 1755년(영조 31)에는 경주부윤 이수득이 남문루를 중건하였다.
이후의 1933년에 간행된 『동경통지』 역대 수관 편에서 “부윤 조기영이, 고종 7년(1870)에 성첩과 포군을 수리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병인양요 이후 관방 시설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경주읍성에 대한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남긴 경주읍성에 대한 기록에서 “성벽 및 남문의 구조는 대부분 다른 것과 같지만 곡성을 이룬 것은 다른 데서 많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벽은 평지에 축조한 것으로서 높이는 대략 20척 가량이며 약 30~40문 가량의 벽을 곳곳에 돌출시켰다. 소위 곡성이다. 벽 바깥에는 다시 넓이 2문 가량의 마른 해자인 황(湟)을 뚫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즉, 이 시기까지는 경주읍성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2년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寺內]가 석굴암을 순시할 당시에 읍성 남문을 철거하고 남쪽으로 도로를 확장하여 노동과 노서로 나누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1933년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남긴 경주읍성의 기록에서는 성벽 대부분이 철거되어 잔해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경주읍성이 훼손되었다.
각종 기록과 함께 고지도에서 경주읍성 내에 다양한 시설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 읍성의 4문과 함께 내부에 일승각(一勝閣), 고각루(鼓角樓), 내아(內衙), 부창(府倉), 장교청(將校廳), 전결소(田結所), 필야헌(必也軒), 공고(工庫), 옥(獄), 동경관(東京館) 등의 관아와 부속 건물 등이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현재는 경주 문화원에 일부 건물과 이전된 동경관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다.
경주읍성은 1985년 이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성벽과 내부 건물지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1985년에 성 내부의 추정 주전지에 대한 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1996년에는 서부동 2-30번지 유적을 조사하면서 읍성 서벽 기저부를 확인하였다. 1997년에는 서부동 19번지 유적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및 감옥을 확인하였다. 1998년에는 동부동 159-1번지 유적에서 연못, 도로 유구 등과 함께 금학헌(琴鶴軒)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2004∼2005년과 2008년에 북문로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벽에 3개소의 치(雉)도 확인되었다.
2009년에 경주읍성에 대한 복원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2012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현, 국가유산진흥원)에 의해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 조사가 연차적으로 진행되어 성벽의 구조 등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경주읍성은 현재 석축성으로 보수 중이지만, 발굴 조사 과정에서 석성 이전에 토성의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 이는 토성의 내탁부에 대한 단면 절개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토성은 기저부 석열과 중심 토루 외측으로 내외피 토루(土壘)가 조성되었다. 성벽 내외측 하단부에 석열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려시대 토성의 축조 기법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경주읍성이 토축으로 조성되었다가 조선 초에 석축으로 개수되었다는 기록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석축 상태 경주읍성의 둘레는 2,412m이고, 평면 방형에 외측과 석축 내측은 등성 시설 역할을 하는 토축이 이루어진 편축식이다. 기저부와 성곽의 몸통을 이루는 성벽 몸체 부분의 면석은 기단석에서 내측으로 1015㎝ 들여쌓기를 하였고, 14단 정도가 잔존한 상태이다. 치성의 경우 8단 정도까지 잔존한 구간이 7m 정도 확인되었다. 면석 14단은 길이가 2080㎝, 두께가 1015㎝ 정도인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면석의 안쪽에는 할석 또는 천석으로 높이를 맞추어 뒤채움 한 흔적도 확인된다. 치성이 위치한 곳의 성벽 몸체 부분은 14단보다 상대적으로 큰, 길이 3090㎝, 두께 2040㎝ 정도의 석재와 이전 시기의 건축 부재 등을 사용하여 허튼 층 쌓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