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전국에서 5천 명의 승군을 일으켰고 8도 도총섭을 제수받았다. 처음에는 승장의 최고위직이라는 의미에서 판사라는 명칭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 선교양종의 승정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고려 말에 쓰이던 도총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8도에는 선과 교의 총섭이 2명씩 배치되었다. 당시 조정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자 군사 업무와 국정을 관장하던 비변사(備邊司)에서 승직 임명 등의 인사 관리를 담당했다. 도총섭과 총섭은 승병의 공을 평가하여 비변사에 보고했고, 승군 활동의 대가로 발급된 선과첩(禪科帖: 일종의 도첩)을 나눠주는 권한을 가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의승군 전통을 계승하여 승려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승역과 승군을 활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었고, 총섭 제도도 유지되었다. 승역은 궁궐, 산성, 능묘, 제방 등을 만들 때 부과되었고, 점차 국가의 부역 체계 안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되기에 이르렀다. 승역을 진 승려에게는 도첩(度牒)이나 호패(號牌)가 발급되어 국가가 승려의 자격과 활동을 인정해주었다.
1624년부터 1626년까지 남한산성을 만들 때 승군이 힘을 보탰으며, 8도 도총섭이 다시 임명되었다. 이후 주요 산성 및 사고 등 승군이 배정된 곳에 총섭이 함께 배치되었다. 당시 승려의 인사 행정은 예조가 담당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는 강화도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무주 적상산 사고의 수호 사찰인 전등사(傳燈寺), 월정사(月精寺), 각화사(覺華寺), 안국사(安國寺)에 수호 총섭이 임명되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의승장을 제사 지내는 밀양과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태조의 제사를 지내는 함경남도 석왕사(釋王寺,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산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등 왕실의 주요 원당, 고려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海印寺) 등에도 총섭 직책이 있었다.
조선 정조 대에 수원(현 경기도 화성) 용주사(龍珠寺)가 창건되고, 8도의 승군을 통솔하던 도승통(都僧統)을 중심으로 한 5규정소(五糾正所) 체제가 가동되었으나, 정조가 죽은 후 이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에는 교단을 통솔하는 기구나 승직의 권위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총섭 직책도 남발되어 큰 규모의 사찰에서는 주지의 상급 또는 동급의 의미로 총섭 명칭을 임의대로 쓰기도 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을 비롯한 승군 및 승역 제도와 승직은 갑오개혁(1894~1896) 때 폐지되었다.
총섭이라는 직책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통솔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이후 승역을 활용하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되면서, 총섭은 승군을 통제하고 승풍을 규정하는 역할을 맡으며 불교계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