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성벽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성벽
건축
유적
국가유산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이칭
이칭
주장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남한산성(南漢山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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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개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역사적 변천

1985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래,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쳐 행궁터, 인화관터, 일부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대략적인 축성 시기와 함께 변천 과정도 파악되었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4,3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곧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였고,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남한지(南漢志)』에는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곳의 옹성과 16곳의 암문, 125곳의 군포, 4곳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내용

통일신라 때 석축산성은 그 규모나 축성 기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성 안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어 돌로 쌓은 성벽과 여러 시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대형 건물터는 길이 53.5m, 너비 18m 규모로,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은 사방으로 회랑칸을 둔 구조로, 벽체의 두께는 2m나 되며, 길이 50~64㎝, 무게 20㎏의 특대 기와를 올렸으므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였던 특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가운데는 ‘갑진성년말촌주정량(甲辰城年末村主政亮)’, ‘마산정자와초(麻山停子瓦草)’, ‘관초(官草)’, ‘천주(天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것도 다수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에 국가 기관과 밀접히 관련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자리하였다. 원성에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1744년(영조 20)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1779년(정조 3)에 다시 원성을 고쳐 쌓을 때 기와로 덮었던 것을 전돌로 바꾸었다. 현재 남아 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타구(垛口)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올려 놓았다. 성벽에는 원성 4곳, 봉암성과 한봉성 사이 1곳 등 5곳의 치(雉)도 설치되어 있다.

한편 7곳의 포루가 있는데, 제1남옹성 8곳, 제2남옹성 9곳, 제3남옹성 5곳, 장경사 부근 원성 2곳, 장경사 신지옹성 2곳,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칸,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성 안에는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이밖에도 비장청과 교련관청, 기패관청, 군관청, 별군관청, 서리청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자리하였다. 또한 행궁 및 관아의 소요 물품과 여러 가지 관수 물자를 비축하고 군량을 보관하기 위한 영고, 수창, 신풍창, 별창, 동창, 군기도 등 많은 창고도 들어서 있었다.

한편 산성 안에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옥정사, 남단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특징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의 조성 연대는 절대 연대를 측정한 결과 대부분 600∼900년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건물터에서 출토된 도장무늬[印花文] 토기 조각과 목 부분에 물결무늬가 있는 대형 항아리, 각병(角甁) 등이나 기와의 제작 및 사용 연대가 7세기 후반~10세기 전반이라는 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 건물터는 성벽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주장성 관련 유구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원성의 여장 옥개 중심선을 중심으로 측량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가 둘레 7.545㎞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12만 6637㎡이며,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에 달하였다. 원성에는 여러 차례 개·보수가 이루어진 흔적이 확인되는데, 특히 성벽의 윗부분, 여장 아래쪽 1m 안팎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부분은 여러 차례 개축되는 과정에서 인조 때 가지런히 정비되었던 성벽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으며, 암문이나 성문 등 붕괴되기 쉬운 곳도 여러 번 개축이 이루어졌다.

인조 때 축성한 원성은 지반 위에 길게 잘 다듬은 장대석을 받침돌로 쌓고 성돌을 바른층쌓기로 올렸다. 곧 성돌의 받침돌은 길이 50cm, 두께 30㎝이고, 그 위로 너비 30㎝, 두께 20㎝ 크기의 성돌을 네 모서리를 잘 다듬어 면석으로 사용하였으며, 뒷채움은 잡석으로 깊게 하였다. 면석은 4각뿔 모습이지만, 성벽의 바깥쪽 면은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부채꼴 모양이며, 모서리 부분은 매끈하게 다듬질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읍지(廣州邑誌)』
『남한일기(南漢日記)』
『병자록(丙子錄)』
『남한산성: 암문(4)수구지일대 발굴조사』(중원문화재연구원, 2007)
『남한산성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남한산성 행궁지: 시굴·1∼6차조사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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