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의 진산인 해발 394.3m의 설봉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봉우리의 7∼9부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울러 산성의 서쪽에 있는 설봉산 정상부 봉우리와 북쪽 봉우리에도 각각 테뫼식 성곽을 쌓은 2개의 부성(副城)을 두고 있다. 산성에서는 이천은 물론 멀리 장호원과 양평·안성 지역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벽과 함께 토기가 다량 출토되었으며, 신라토기 조각도 적지 않게 확인되었다. 따라서 신라가 6세기 중반 전후에 흙으로 쌓은 백제 성곽 위에 돌로 성벽을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 대한 기록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등에는 산성의 둘레가 5,112척이라고 하거나 성의 이름이 왜성(倭城)이며 둘레 1,500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시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성을 쌓은 시기는 훨씬 이전임을 알 수 있다.
1998년~2005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곽의 잔존 상태와 축조 기법, 그리고 성 안의 장대터, 서문터 등을 비롯하여 저수시설, 저장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주성(主城)의 성벽은 해발 322∼246m 사이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남·서쪽은 높고 북·동쪽은 낮은 편이다. 북쪽으로는 원적산과 용문산, 동쪽으로는 여주읍과 이천평야, 남쪽으로는 장호원과 망이산성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서쪽은 설봉산 정상에 가로막혀 있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정상 주변에 부성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성에서는 서쪽의 용인과 안성 지역이 내려다 보인다.
성벽은 지형 조건에 따라 편축법(片築法)과 협축법(夾築法)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바닥 부분은 자연암반을 ‘L’자형으로 파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지반이 연약한 곳에서는 기둥 구멍이 1.9m∼2.2m 간격으로 확인되었는데, 바깥쪽 벽면에 목조 가구 시설을 설치하고서 성벽을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돌은 주변의 풍부한 화강암을 잘라 크기와 형태를 규격화한 뒤 성벽 바깥면에 빈틈이 없고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기본 규격의 성돌은 네모난 모습인데,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2:1 또는 3:1로 다듬었다. 성벽은 기본 규격의 네모난 성돌을 2∼3단 쌓고서 중간에 1단씩 두께가 얇고 길이가 길면서 네모난 판상석을 놓거나 모든 면의 길이가 일정한 네모난 돌을 교대로 쌓은 뒤 뒷채움돌과 견고하게 맞물리게 하여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쌓았다.
부성 역시 축성 방법은 주성과 같으며, 성 안의 시설물로는 문터 1곳, 건물터 5곳, 치성 2곳이 남아 있다. 주변에 절벽과 암반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연암반의 화강석을 잘라 성돌로 이용하였는데, 암반을 자를 때 생긴 부석은 2차 가공하여 암반 사이의 틈을 메우는데 활용하였다. 지반이 약한 곳은 기반토인 풍화암층을 단이 지게 깎아내고 2차 가공된 면돌과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면돌의 모습은 정방형, 장방형, 판석형 등이다.
부성에서 북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해발 361.5m의 작은 봉우리에 또 하나의 부성이 있다. 이 부성 역시 봉우리의 8∼9부 능선을 둘러싼 테뫼식 석성으로, 평면은 방형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건물터 2곳, 치성 1곳, 추정 저수조 1곳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주성이나 앞의 부성과 같다. 성벽의 바닥 부분은 풍화암반을 깎아 편평하게 한 뒤 그 위에 면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
성벽과 성 안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 솥과 용기, 뚜껑 등의 취사용기류와 보습, 볏, 살포, 낫, 도끼, 망치 등의 철제 농공구류, 다양한 형식의 철촉 등 6세기 중엽~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들 산성은 신라에 의해 축성된 뒤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문터에서는 문터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초축 성벽과 수구(水口)가 함께 확인되었다. 수구터는 2003~2005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성벽이 최소 3차례의 수·개축을 거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곧 능선에는 석축으로 조성된 편축 성벽과 토루로 조성된 성벽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고, 계곡에서는 성벽 축조 후 내부에 조성된 토축 부분에서 목재 기둥을 비롯한 부엽층, 성벽과 연결된 암거 2기가 조사되었다. 부엽공법은 연약 지반에 제방이나 성을 축조할 때 흙을 쌓기 전이나 하던 중에 초본류나 나뭇가지, 식물섬유를 엮어서 만든 편물이나 삼나무 껍질 등을 일종의 보강재로 사용하는 토목공법이다. 이 공법은 주로 백제 제방이나 토성 등에서 나타나고 있어, 설봉산성이 처음에는 부엽공법 등을 구사한 백제 토축산성으로 만들어졌음을 알려 준다.
주성에는 남장대터가 있는데, 남장대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적심초석 건물로, 신라 경문왕 때 연호인 ‘함통육년(咸通六年)’명 벼루가 출토되었다. 또한 저수시설은 남장대 건립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암반층을 굴착한 뒤 정방형으로 석축을 쌓아 벽체를 구성한 모습이며, 석축의 앞뒤에는 점토를 빈틈없이 다짐하여 물이 새 나가지 않게 하였다. 규모는 가로 5.7m, 세로 5.8m이며, 깊이는 0.8m이다. 칼바위 주변의 평탄대지에서는 목이 길고 몸은 둥근 플라스크(flask)형 저장 구덩이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그 안에서 대형 항아리, 굽다리접시, 짧은 목 항아리, 시루 등 한성백제시기 토기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서문터 바닥시설 아래에 묻혀 있는 수구는 설봉산성을 처음 쌓을 때 만든 것으로, 입수구 주변과 수구 안에서 세발토기와 함께 굽다리접시류, 항아리류 등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고 신라 유물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써 보아 신라에 의해 석성이 축조되기 전에 백제 성곽이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후에 서문터는 크게 고쳐졌는데 이 때 수구는 덮개돌 윗면으로 1~2m 이상 점토다짐을 하여 바닥시설을 한 뒤 그 위에 성문을 만든 모습이다. 아마도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6세기 중반경에 개축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봉산성이 위치한 이천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와 고구려에 속하였지만,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에는 전략 요충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특히 신라의 지방군사조직인 10정(十停) 중 하나인 남천정(南川停)이 설치될만큼 행정·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설봉산성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지방 행정·군사의 거점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함통 연호가 적힌 벼루를 비롯하여 돌로 만든 봉인(封印), 석전용 석재 18점은 이곳이 문서 행정이 집행되던 군사·행정 거점이었음을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