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산 봉우리에서 동서로 뻗은 100m 안팎의 산등성이에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1980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원래 백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뒤에 돌로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안에서는 백제 사비시기 토기와 기와,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때 조성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덕성이라고도 부른다. 곧『삼국사기』와『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된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이 문무왕 10년(670) 6월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자리잡은 뒤 신문왕 4년(684) 11월까지 보덕국에 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므로,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다만『신증동국여지승람』익산군 고적조에는 “보덕성은 군 서쪽 1리에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라고 한 것을 토대로, 현재의 익산토성을 보덕성으로 지목하였다. 같은 책 불우조에도 “오금사(五金寺)가 보덕성 남쪽에 있다”고 하여, 익산토성을 보덕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거하여 보덕성인 익산토성을 보덕국의 치소였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로 나타난 입지나 구조, 내부 시설,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보덕국의 치소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고, 성벽 전면에 걸쳐 돌을 맞추어 쌓았던 흔적이 확인되므로 토성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4m 안팎이고, 너비는 5.5~6m이다. 남쪽 성벽 일부는 처음 쌓은 지점에서 약간 앞으로 내어 고쳐 쌓았지만, 나머지 3면은 평면 구조의 변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쪽 이외의 성벽은 1∼2단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토루를 쌓은 구조이다. 바깥쪽 성벽 받침돌 앞에는 3∼6m의 외환도(外環道)를 두었고, 그 앞에는 물 없는 못인 외황(外隍)을 설치하였는데 그리 깊지는 않은 편이다. 성벽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에는 누대(樓臺)가 있었던 듯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제법 많이 출토되었다.
토루(土壘)는 북쪽 성벽의 경우 산의 경사면에 기대어 내탁(內托)하여 판축 방식으로 흙을 쌓았고, 남쪽 성벽은 호석열(護石列)과 기둥을 설치하고 판축 방식으로 흙을 쌓았다. 기둥 구멍〔柱孔〕의 지름은 30㎝ 안팎이고, 간격은 1∼1.4m로 일정하지 않다. 기둥 구멍과 판축한 토루가 끝나는 동쪽 성벽에서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돌을 이용하여 남 · 북쪽 성벽에 면을 맞추어 협축(夾築)한 처음의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흙과 막돌로 다져 채웠으며 너비는 6m이다. 남쪽에 다시 쌓은 성벽은 네모지게 잘 가공된 성돌로 축조하였는데, 성돌은 길이 40∼50㎝, 두께 30∼40㎝로, 8단 정도가 남아 있다.
산성의 정문인 남문은 너비가 약 4.3m 정도로, 처음 쌓은 성벽의 판축 토루를 잘라 만들었는데, 터의 동쪽 벽은 기초 부분만 남았으나 서쪽 벽은 몇 단이 남은 상태이다. 문터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던 흔적이 있고, 위에는 문루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기초 부분의 앞면은 단벽(段壁) 형태로 쌓았지만, 뒷면에는 깬돌 등의 막돌로 두께 5.2m를 뒷채움하였으며, 뒷채움석 뒷면에는 모래와 점토를 번갈아 판축성토하였다.
문터의 동쪽과 서쪽 벽 아래에는 좁은 배수로가 설치되었으며 2개의 문비주공석(門扉柱孔石)도 확인되었다. 문터 앞면에는 문을 드나들기 위한 몇 단의 계단 시설도 남아 있다. 돌로 고쳐 쌓은 성벽의 바깥쪽 벽은 비교적 크고 네모지게 잘 다듬어진 성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나 안쪽 벽은 작고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깬돌로 쌓았다.
성곽 안의 서쪽 경사면에서는 밑이 넓고 목이 좁은 플라스크 모양의 백제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처음에 토성을 축조한 뒤 일정 기간 동안 백제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음을 알려 준다. 서쪽 성벽 능선 중앙부에서는 윗부분 지름 1.5m, 아랫부분 지름 1m, 현재 깊이 0.9m인 돌로 쌓은 둥근 우물 모습의 유구도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용도와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두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에 걸친 많은 토기와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 유물로는 항아리, 벼루, 시루, 뚜껑접시 등의 토기와 연화무늬 · 물결무늬 · 무늬없는 수막새, 도장이 찍힌 기와(印刻瓦) 등 상당수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도장이 찍힌 인각와에는 ‘모(毛)’, ‘전(煎)’, ‘해(解)’, ‘사(斯)’, ‘경(京)’, ‘장(長)’, ‘상□(上□)’ 등의 글자가 있으며, 익산의 옛 지명인 ‘금마저(金馬渚)’가 돋을새김된 암키와도 있다. 백제 토기나 기와류는 주로 수구 안의 광장과 남문터 주변, 동남 모서리의 대지 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반면에 통일신라시대 유물은 동남 모서리의 대지에서 발견되었고, 고려시대의 것은 동남 모서리의 대지와 서남 모서리의 대지 위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물이 수구 안의 광장과 남문터 주변에서 전혀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석성으로 개축된 시기는 백제 말이나 통일신라 초로 판단된다. 또한 백제 유물이 대체로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편년되므로, 이 성은 이 시기에 처음 축조된 뒤 다시 돌로 쌓은 다음에 고려시대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토성은 백제 산성이 테뫼식에서 포곡식으로 변화하였고, 석축과 토루의 두 가지 축성 방법으로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특히 토루는 판축 공법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외피석과 함께 기둥 구멍을 설치하고서 판축성토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산성은 익산 왕궁리의 백제 궁성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백제 무왕 때 익산 천도를 위해 축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궁성과 함께 백제 왕실이 익산 지역을 경영하려고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불어 왕궁리 궁성으로 이어지는 만경강 유역을 방어하면서,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산성, 용화산성, 선인봉산성 등과 함께 낭산이나 삼기, 함열 방향의 요로(要路)를 지킬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