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은 부산 금정구 금정산 정상부에 있는 조선 시대 돌로 쌓은 성곽이다. 동래산성이라고도 한다. 성벽은 18,845m, 성벽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척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북 4곳의 성문과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문, 누가 없이 만들어진 암문 등이 있다. 1667년(현종 8)에 보수를 건의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금정산성은 조선 시대 국방사 연구와 해안 관방체계 연구에 중요한 산성이다.
산성은 1667년(현종 8)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의 보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에는 1701년(숙종 27)∼1703년에 쌓았으며, 성벽의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척으로, 사방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1740년(영조 16)에 발간된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 및 성곽조에는 1707년에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너무 넓기에 남북으로 두 구역을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좌기청(座起廳) · 내동헌(內東軒) 등의 관아 건물과 장대(將臺), 중군소(中軍所), 교련청(敎鍊廳),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 승장소(僧將所), 산성창(山城倉) 등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중수하고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문 · 남문 · 북문에 문루를 만들고는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당시 성벽의 길이는 32리였으며, 산성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다고 한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에는 장대가 동서남북 4곳의 대문과 국청사 뒤쪽에 1곳씩 있고, 본성과 중성에 각각 10곳과 2곳 등 총 12곳의 망대(望臺)가 있었으며, 그 밖에 수문 3곳, 중성 석문 1곳, 아문(亞門) 1곳 등의 성내 시설물이 자리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숙종 이래로 산성 수축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현재 남아 있다.
성벽의 몸체인 체성벽에서 성벽 위 여장(女墻)의 기초석인 미석(眉石)까지는 높이가 낮은 곳이 표토에서 1.5m이고 높은 곳은 1.8∼2.1m이다. 미석은 두께 10㎝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는데, 20㎝ 정도 돌출시켜 설치하였다. 여장은 20∼80㎝ 정도 높이로 남아 있으며, 동문터 주변의 복원된 부분은 높이가 90㎝에 이른다. 가장 높게 남아 있는 북쪽벽 일부는 안쪽벽 바닥에서 여장 윗부분까지의 높이가 1.2m여서, 조선시대 여느 성곽의 여장 높이와 같다. 다만 바깥벽 미석을 기준으로 하면 높이가 80㎝이며, 특히 미륵암 북쪽 암반 주변에는 약 1m 정도의 성벽도 남아 있다. 따라서 여장을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원래 3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돈대(墩臺)로 추정되는 제3망루 남쪽과 일부 구간에서만 여장에 총안(銃眼)이 설치되어 있어, 여장은 특수한 곳만 설치되었거나 복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4년에 실시된 죽전마을 금성동 일대 시굴조사에서는 높이 30∼80㎝, 너비 70∼80㎝, 석축 2∼4단이 잔존하는 동서 5.6m, 남북 2.4m 규모의 석축 담장 유구가 총 8m 가량 확인되었는데, 고지도에 있는 금정진의 외곽 담장으로 추정된다.
체성벽은 기저부에서 높이 1.5m까지는 길이 0.8∼1.1m, 두께 25∼70㎝ 크기의 큰 깬돌과 조그마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로에는 길이 30∼50㎝, 두께 15∼30㎝ 크기의 납작한 깬돌〔板狀割石〕과 조그마한 돌을 쌓았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금정산의 화강암반을 사용하였기에 구간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중성벽은 길이 0.4∼1.2m, 두께 50∼7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부산 주변 수군진성(水軍陣城)의 성벽처럼 큰 깬돌 사이로 조그마한 돌을 끼워가며 세워쌓기한 수법도 보인다. 또한 아문(亞門) 주변의 성 바깥벽 및 남문 동쪽벽에서는 약 5m 구간마다 수직줄눈이 보여, 일정한 구간별로 순차적으로 성벽을 축조해 나갔던 것 같다. 경사면 성벽 윗부분에서는 2.1∼3m 간격으로 체성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성벽이 곳곳에서 확인되어, 2∼3m 구간마다 계단식으로 축대를 덧붙여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대부분 주변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화강암제의 납작한 깬돌이며, 제4망루와 동성벽 사이, 문터 주변, 중성벽은 비교적 큰 네모난 깬돌이 사용되었다. 이들 구간은 평평한 편으로 방어에 취약하기에, 주로 동래쪽 성벽에 큰 돌을 사용하여 보다 견고하게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벽의 너비는 3.5m 내외인데, 대부분 바깥쪽은 큰 돌로 쌓고 안쪽은 작은 돌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되어, 바깥벽에서 1.1∼2.1m 안쪽까지는 막돌로 채웠으며, 그 안쪽은 흙으로 뒷채움을 하였다. 한편 문터 주변과 경사지에서는 안쪽벽의 안쪽을 따라 자연 배수가 되도록 한 너비 5∼15m, 깊이 5m 정도의 ‘V’자형 도랑〔溝〕이 확인되는데 내황(內隍)으로 보인다. 또한 동성벽과 북성벽에서는 활모양〔弧形〕의 치상(雉狀)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외견상 둥근 모양의 치 같기도 하지만, 성벽 윗부분이 훼손된 바깥벽 기저부에 덧붙여 축조한 것으로 후대에 성벽을 보강하거나 보수할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금정산성은 축성 과정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자, 동래읍성(東萊邑城)과 함께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국방사 연구와 해안 관방체계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