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의 벼슬은 기록을 담당하던 관원인 도필(刀筆)을 거쳐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에 이르렀다. 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먼저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다는 점에서 이천(利川)에서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豪族)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처음 관계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커다란 세력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필의 정치적 성격은 광종(光宗)의 정치 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광종계 인물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전자에서는 쌍기(雙冀)와 같은 귀화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광종에 대해 직언과 간쟁(諫諍)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즉, 훈신세력(勳臣勢力)의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필의 건의나 직언이 받아들여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내의령의 높은 관직에 중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해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혁 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판적이었던 반면 그는 임금의 개혁 의지를 지지하였고, 이에 따라 높이 등용되었다. 결국 서필은 광종과 밀착되어 그의 정치 개혁을 지지해 주고 있던 인물로 보인다.
서필은 965년(광종 16)에 죽었고, 나이는 65세였다. 죽은 뒤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994년(성종 13) 유신성(劉新城)과 함께 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