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

고려시대사
개념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이칭
이칭
여직(女直),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만주족(滿洲族)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여진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만주족 등으로 불렸다.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세웠다. 16∼17세기, 누르하치[奴爾哈齊]가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정의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개설

여진족(女眞族)은 주로 송화강(松花江) · 목단강(牧丹江) · 흑룡강(黑龍江) 유역의 만주 지역과 압록강(鴨綠江) · 두만강(豆滿江) 유역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만주족(滿洲族) 등으로 불렸다.

여진은 발해 멸망 후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고려에 조공(朝貢)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요나라가 쇠퇴하자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을 통일하고 금(金)나라를 세웠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골에 멸망하자, 여진은 다시 만주 지방에서 부족 단위로 할거하였다.

조선에서는 요동과 만주에 흩어져 있는 여진 세력을 알타리(斡朶里, 오도리(吾都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 토착여진(土着女眞)으로 구분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진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구분하였다.

조선 수직(授職)과 내조(來朝)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회유하여 조선 중심의 상하관계를 형성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번리(藩籬) 또는 번호(藩胡)라고 불렀다.

16∼17세기, 누르하치[奴爾哈齊]가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후금은 1636년 청(淸)으로 국호를 고쳤으며, 여진을 통틀어서 만주족이라고 일컬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이전의 여진

만주에는 일반적으로 여진과 계통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이 일찍부터 활동하였다. 이들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숙신,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물길, 수(隨) · 당(唐) 시대에는 말갈(靺鞨)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종족 모두 여진의 직계 조상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여진과 말갈 사이에는 인종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말갈은 지금의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유역과 백두산(白頭山)을 중심으로 두만강, 압록강 유역 일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였다.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신라와 당과의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발해를 건국할 때 참여한 고구려 유민이었다.

고려시대의 여진

여진이라는 명칭은 10세기 초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즉, 발해 멸망 후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발해 유민과 흑룡강 및 송화강 일대에서 남하한 말갈의 흑수부(黑水部), 그리고 말갈의 여러 종족을 통칭해 여진이라 하였다.

여진은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고려에 조공(朝貢)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거란과 고려에서는 만주의 서쪽 지역과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숙여진(熟女眞) 또는 서여진(西女眞), 서번(西蕃)이라고 하였다. 만주의 동 · 북쪽 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생여진(生女眞) 또는 동여진(東女眞), 동번(東蕃), 북여진(北女眞), 북번(北蕃)이라고 하였다.

숙여진은 고려와 송(宋)의 영향을 받아 농경화되어 거란에 복종한 여진으로, 생여진에 대해서는 수렵 위주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거란에 복종을 거부한 여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고려는 건국 이래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발해 유민뿐만 아니라 여진 귀화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었다. 또한, 고려 초기부터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조공과 내조(來朝)를 하게 하였으며, 추장(酋長)에게는 무산계(武散階)향직(鄕職)을 주었다.

당시 여진인들은 고려에 활 · 말 · 모피 등을 주로 가져오고, 의류 · 식량 · 농기구 등의 생활필수품을 주로 가져갔다. 고려는 여진의 조공과 내조 · 내헌(來獻)을 통해 고려를 중심으로 한 상하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여진인들을 서번, 동번, 북번으로 부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번(蕃)은 번병(藩屛)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려가 인식한 여진과의 관계는 대방(大邦)과 제번(諸蕃)의 관계였는데, 이는 고려의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여진은 내륙과 해안으로 고려를 침입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11세기 초 동여진은 바다를 통해 고려의 동해안 지역을 침입하였다. 이들은 ‘동여진의 해적(海賊)’ 또는 ‘동여진의 해구(海寇)’ 등으로 불렸는데, 동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침입하였고, 심지어는 일본(日本) 쓰시마[對馬島]와 큐슈[九州]도 침입하였다.

일본에서는 1009년 발생한 동여진의 침입을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 ‘도이의 적[刀伊の賊]’이라고 부른다. 고려에서는 동여진의 해적을 막기 위해 동해안 연안 일대에 성을 축조하고, 1009년 지금의 북강원도 원산에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를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배치하였다.

1019년 일본의 쓰시마와 큐슈를 침입하여 일본인들을 약탈한 뒤 돌아가던 동여진의 해적들은 고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고, 고려에서는 피납되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구출하여 일본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11세기 말에 이르면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쇠퇴하면서 하얼빈[哈爾濱]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생여진의 완안부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을 통합해 가면서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1104년 영가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가 더 남하해 고려에 복속되었던 여진인들을 침탈하였으며, 완안부에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추격하여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임간(林幹)을 보내 우야소를 정벌하게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을 보내었으나 윤관 역시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 결과 정평의 장성 밖 여진은 완안부에 복속되었다.

윤관은 숙종에게 기병(騎兵)의 양성과 군량의 저축 등을 건의하고,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부대인 항마군(降魔軍) 등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다.

그 후 1107년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 오연총(吳延寵)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으로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九城)을 쌓았다. 이를 소위 ‘동북 9성’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의 민호(民戶)를 옮기어 9성에 이주시켰으나, 여진의 계속된 침입과 9성을 돌려달라는 애원에 결국 1년 만에 돌려주었다.

이후 1115년에 우야소의 후손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일하고 금(金)나라를 세웠고, 1117년에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다. 금나라는 1125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점령하자,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고, 남송(南宋)과의 교류도 간섭하였다. 당시 고려의 집권자인 이자겸(李資謙) 일파는 금나라와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려와 금의 사대관계가 성립하였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골에 멸망하자, 여진은 만주 지방에서 부족 단위로 할거하였다.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여진인들의 이동을 제한하는 등 여진은 원나라의 지배와 통제를 받았다.

이후 원나라가 쇠퇴하게 되자 송화강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삼성(三姓) 지방의 여진 부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남하하였다. 따라서 고려 말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고려 유민, 몽골인, 여진인 등이 혼거하였다.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퇴하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고, 요양(遼陽)에 있는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게 하였다. 1368년 건국한 명(明)나라는 요동(遼東)과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만주 지역의 여진과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고려의 요동 진출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고려에서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 시도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시대의 여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동북면으로, 고려말 동북면은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이 혼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자신에게 종군(從軍)하였던 여진 추장들에게 만호(萬戶) · 천호(千戶) 등의 관직을 하사하였으며, 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내조를 받아들이고 무역을 허가하였다. 또한, 태조는 서북면과 동북면의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여진인들의 귀화를 장려하여 관직과 토지, 주택 등을 주어 우대하였다.

조선의 여진에 대한 회유 정책은 여진인들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수직(授職) 정책과 여진인들을 상경(上京)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는 내조 정책이 핵심인데, 이러한 회유정책은 태조 때부터 시행되었다. 조선 역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공과 내조를 통한 조선 중심의 상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는 조선 전기 내내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 명나라는 조선의 여진 회유와 요동 진출을 의심하여 조선을 압박하였고,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중심이 되어 요동 정벌 계획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요동과 만주에 흩어져 있는 여진 세력을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 토착여진으로 구분하였다.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은 고려 말 삼성 지방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남하한 종족이었고, 토착여진은 예전부터 두만강과 동북면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이었다. 이들은 압록강 이북과 두만강 이남 · 이북에 광범위하게 거주하였고, 올적합의 경우는 그 종족이 다양하여 두만강부터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유역 등에 흩어져 살았다.

명나라에서는 여진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구분하였다. 건주여진은 요동과 압록강 유역에, 해서여진은 해서강(海西江)과 송화강 하류 유역에, 야인여진은 송화강 · 목단강 · 흑룡강 유역에 주로 거주하였다.

건주여진은 주로 올량합과 알타리로 구성되었으며,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은 올적합의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에서는 해서여진에 대해서 홀온(忽溫) · 화라온(火剌溫) · 홀라온(忽剌溫) 등으로 불렀다.

명나라는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한 후, 여진을 회유하면서 적극적으로 요동 진출을 도모하였는데, 그의 요동 진출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여진위소(女眞衛所)’를 설치하여 여진인들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흑룡강 하류 동쪽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즉,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요동 지역에 설치된 ‘여진위소’는 요동도사(遼東都司)의 형식적인 통제를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지의 여진 추장이 그대로 위소 관직을 받고 세습하며 명나라에 내조하면서 조공을 바치고, 무역을 허락받았다.

흑룡강 하류에 설치된 노아간도사도 형식적으로 흑룡강 유역 등지의 ‘여진위소’를 관할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지의 여진위소를 통제할 수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다.

명나라는 1403년 압록강 유역에 건주위(建州衛)를, 1405년 두만강 유역에 건주좌위(建州左衛)를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만강 유역과 동북면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 10처인원(十處人員)의 귀속 문제와 오음회(吾音會, 지금의 회령) 지역의 알타리 대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의 입조(入朝)를 둘러싸고 조선과 명의 외교적 갈등이 발생하였다.

조선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공험진(公嶮鎭) 이남에서 철령(鐵嶺)까지 조선이 그대로 관할하라는 성지(聖旨)가 있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집안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이유를 들어 10처의 여진 인민들을 그대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다시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하여 입조(入朝)를 요구하자, 조선 태종은 그가 동북면의 번리(藩籬)라며 이를 반대하였다. 결국 명나라에서 조선을 계속해서 압박하고, 동맹가첩목아가 스스로 명나라에 입조하면서 두만강 유역에 건주좌위가 설치되었다.

조선은 여진이 명나라의 회유에 응해 ‘여진위소’를 개설 받자, 경원에서의 여진과의 무역을 단절하였는데, 여진과의 무역 단절은 생필품을 구하지 못하게 된 여진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1406년 조선은 함경도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여 여진인들에게 변경에서의 무역을 허락하였으나, 여진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1410년 여진인들이 경원에 침입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가 전사하자,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에 대한 정벌을 최초로 단행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정묘호란 이전까지 여진 세력은 조선을 총 131회 침입하였으며, 조선은 15회에 걸친 여진 정벌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여진이 변경을 침입하여 그 피해가 매우 큰 경우에는 군사적 대응과 응징을 목적으로 여진 정벌을 감행하였다.

1410년 조선의 여진 정벌로 여진의 보복 침입이 격화되자, 태종은 경원을 파하고 덕릉(德陵)안릉(安陵)도 함주로 옮겨 여진에 대한 방어선을 후퇴하였다. 1411년 오음회에 거주하던 동맹가첩목아의 건주좌위 역시 조선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건주위가 옮겨가 있던 개원(開原)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개원에서 명군(明軍)을 도와 몽골에 대한 방위를 돕다가 각각 1423년에 두만강 유역으로, 1425년에 압록강 유역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1433년 압록강 유역으로 돌아온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가 여연(閭延)을 침입하자, 조선은 건주위의 근거지인 파저강(波猪江) 일대를 정벌하였고, 1437년에 재차 파저강 정벌을 감행한 후 압록강 중 · 상류 지역에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한편, 동맹가첩목아의 건주좌위가 두만강 유역으로 돌아올 때 그의 관하였던 양목답올(楊木答兀)이 요동을 약탈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동맹가첩목아를 압박하여 약탈해 간 인구를 돌려보내게 하였다. 1433년 양목답올은 오히려 북쪽의 올적합들을 끌어들여 동맹가첩목아를 습격하여 그 일족이 패망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은 두만강 유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조종(祖宗)의 옛 땅을 되찾을 기회라 여기고 이 지역에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6진에는 주로 올량합과 알타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북쪽 올적합의 침입을 막아주는 울타리[藩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종은 동맹가첩목아의 아들 동창(童倉)과 이복동생 범찰(凡察)이 살아남자, 이들을 회령에 그대로 머물러 두게 하였으나 동창과 범찰은 압록강 유역의 건주위로 달아났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건주좌위의 위인(衛印) 쟁탈을 벌여 분쟁이 거듭되자, 명나라에서는 범찰에게 건주우위(建州右衛)를 개설하여 맡게 함으로써 건주위 · 건주좌위 · 건주우위의 건주삼위(建州三衛)가 성립하였다.

동창과 범찰이 두만강 유역을 떠났지만, 6진 지역에는 알타리의 남은 무리와 올량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종은 6진을 설치하면서 성 안에는 조선인들이, 성 밖에는 여진인들이 거주하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성 밖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성저야인(城底野人)’들이라고 불렀다. 알타리와 올량합은 두만강 유역 내외를 둘러싸며 광범위하게 거주하고 있었으며, 조선에서는 내조와 수직 등 회유 정책을 통해 번리(藩籬)를 공고히 구축해 나갔다.

건주삼위와 조선은 세조 때 다시 통교하였다가 명나라의 간섭으로 관계가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때가 되면 건주삼위와의 통교가 재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유역에 대한 여진인들의 침입이 있자 다시 교류가 중단되었으며, 연산군 때는 조선에서 여진 귀화인 동청례(童淸禮)를 건주삼위에 파견하여 여진의 침입을 금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중종과 명종 때는 폐사군(廢四郡) 지역에 여진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조선에서 이들을 구축(驅逐)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후 압록강 유역의 건주삼위 및 여진과는 압록강 유역의 만포(滿浦)를 중심으로 조선과 여진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여진의 소규모 침입도 반복되었다.

16세기가 되면 만주 지역의 여진인들은 사회 ·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농경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중국에서 개설한 마시(馬市)를 통한 말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또한, 담비 가죽인 초피(貂皮) 등 모피를 매개로 한 상품 거래를 통해 발전을 도모하였다.

조선에서도 두만강 유역의 번리가 된 여진인들을 번호(藩胡)라고도 불렀는데, 번호들의 경제적 발전은 6진 지역의 경제 상황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조선에 초피 등의 모피 등을 가져오고, 조선에서 쌀 · 소금 등의 생필품과 농기구 · 철 · 소와 말을 가져갔다.

조선의 변장(邊將)들은 질 좋은 초피를 얻기 위해 번호들을 수탈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번호들의 이탈과 반란을 초래하였다. 1583년에는 ‘니탕개(泥湯介)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의 발생으로 조선의 번호 통제가 약화되자, 번호들의 반란과 이탈이 일상화되었다.

한편, 압록강 유역에서는 건주좌위 출신의 누르하치가 점차 건주삼위를 통합해 나갔으며, 송화강 유역에는 해서여진이 울라[烏拉], 호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 등의 초기국가 형태로 발생하였다. 이 중 울라의 부잔타이[布占泰]가 해서여진의 통합을 주도하였는데, 그는 만주 지역의 여진 통합을 둘러싸고 누르하치와 경쟁하였다.

특히 부잔타이는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먼저 침탈하여 번호를 철폐하려고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부잔타이의 침탈을 받은 번호들은 누르하치에게 귀부하였고, 1608년 부잔타이의 군사와 누르하치의 군사가 조선의 경내인 종성의 오갈암(烏碣巖)에서 크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함으로써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누르하치에게 귀속되었으며, 번호들은 철폐되기 시작하였다.

1613년 누르하치는 울라를 패망시켰고, 동해안 지역의 여진에 대한 통합을 계속 시도하였다. 마침내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후금은 1636년 청(淸)으로 국호를 고쳤으며, 여진을 통틀어서 만주족이라고 일컫게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이훈, 『만주족 이야기』(너머북스, 2018)
한성주, 『조선시대 번호 연구』(경인문화사, 2018)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경인문화사, 2015)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경인문화사, 2011)
남의현, 『명대요동지배정책연구』(강원대학교출판부, 2008)
박원호, 『명초조선관계사연구』(일조각, 2002)
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국학자료원, 1996)

논문

임형수, 「고려 전기 여진에 대한 무산계(武散階) 수여의 양상과 특징」(『한국중세사연구』 51, 한국중세사학회, 2017)
김선민, 「한중관계사에서 변경사로」(『만주연구』 15, 만주학회, 2013)
추명엽, 「고려전기 ‘번(蕃)’ 인식과 ‘동 · 서번’의 형성」(『역사와 현실』 43, 한국역사연구회, 2002)
강성문, 「조선시대 여진정벌에 관한 연구」(『군사』 1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9)
김구진, 「13C∼17C 여진 사회의 연구: 금 멸망 이후 청 건국 이전까지 여진사회의 조직을 중심으로」(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8)
김구진, 「여말선초 두만강 유역의 여진 분포」(『백산학보』 15, 백산학회, 1973)
집필자
한성주(강원대 교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