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그들이 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바꾸어 가도록 허락하였다. 1406년(태종 6) 도순문사(都巡問使) 박신언(朴信言)이 경성·경원 두 곳에 무역소를 설치해 여진인과의 교역을 허용함으로써 경제적인 교류를 통해 이들의 욕구를 충당시켜 주려고 하였다. 그가 주장한 설치의 목적과 동기는, 여진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염철(鹽鐵)을 자유롭게 사들이게 하여 변방의 근심을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여진인들이 정치적으로 회유 정책에 순응한 것은 그 목적인 경제적인 이익의 획득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욕구는 진상숙배(進上肅拜)라는 의례적인 증여의 성격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역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여진인이 가지고 온 물건은 마필을 비롯해 해동청·산삼·각종의 모피 등이었다.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면포·마포·저포·미두·염장·농구·종이 등을 주었다.
조선시대 외교 정책에 있어서 가장 부심했던 것의 하나가 여진이었다. 여진은 원래 원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명나라가 일어나자 형식상으로는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반농 반수렵 생활을 하면서 자주 조선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은 교린 정책을 쓰는 한편, 때에 따라서는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동북면을 근거로 일어난 태조는 북방 개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세종 때는 김종서(金宗瑞)에게 육진을 설치하게 하고 최윤덕(崔潤德)·이천(李蕆) 등에게 사군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약탈이 완전히 그치지 않았으니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그 대표적 예이다. 경성·경원의 무역소가 언제까지 존속하였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경원의 그것은 1410년 경원부의 치소를 경성으로 옮기면서 자연히 해소되고, 경성만이 존속했으나 폐지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경성·경원 무역소는 청나라 때 회령·경원의 북관개시(北關開市)와 평안도 중강개시(中江開市)의 연원이라는 점에서 한○만 교섭사상 주요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