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직은 고려시대 문산계(文散階)·무산계(武散階)와 함께 사용된 품계이다. 9품 16계로 이루어졌는데 향리를 비롯한 무관(無官)의 노인, 무산계를 가진 자, 군인, 서리, 여진 추장, 일부 문무반 등에게 작(爵)과 같은 의미로 주어졌다. 중앙관인에 대응하여 향리에게 주어지는 품계로 구체적인 관직을 의미하는 실직체제가 아니라 계층적 품계로 추정된다. 문산계제의 성립 이후에는 향계(鄕階) 즉 지방의 위계제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고유의 사회질서를 체계화한 신분질서로 지방 세력의 존재 실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향직은 9품 16계로 이루어졌다. 1품은 삼중대광(三重大匡)과 중대광, 2품은 대광과 정광(正匡), 3품은 대승(大丞)과 좌승(佐丞), 4품은 대상(大相)과 원보(元甫), 5품은 정보(正甫), 6품은 원윤(元尹)과 좌윤(佐尹), 7품은 정조(正朝)와 정위(正位), 8품은 보윤(甫尹), 9품은 군윤(軍尹)과 중윤(中尹)이었다. 그런데 삼중대광과 중대광은 공신이나 고위 관직자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대광 이하의 향직과는 그 성격 및 성립시기를 달리하고 있어 실제 내용상의 향직은 14계가 운용되었다.
향직에 대한 경제적 급부는 1076년(문종 30) 경정전시과에 규정되었는데 전체 향직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 중 6위계인 좌승과 7위계인 대상은 12과에 속하여 전지 40결(結)과 시지(柴地) 10결, 8위계인 원보와 9위계인 정보는 13과에 속하여 전 35결과 시 8결, 10위계인 원윤은 14과에 속하여 전 30결과 시 5결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한편, 향직의 향(鄕)을 경(京)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의미하는 당(唐)에 대응한 것으로 보고 직(職)을 작(爵)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향이 중앙에 대한 의미로 쓰여졌고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 작위제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이중적인 체제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향직은 그 명칭에서부터 중앙관인에 대응한 타세력의 위계로 파악될 수 있다. 이 향직을 향리세력이 받음으로써 향리에게 주어진 품계라는 의미가 주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여진 추장 등 여러 세력도 향직체제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호장(戶長) 이하 향리직과 더불어 지방 세력의 존재실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런가 하면, 향직을 향리직(鄕吏職)으로 보아 호장 · 부호장 · 병정(兵正) · 창정(倉正) · 호정(戶正) · 공수정(公須正) · 식록정(食祿正) · 객사정(客舍正) · 약점정(藥店正) · 사옥정(司獄正), 그리고 이하 부정(副正)과 사(史)에 이르는 모든 향리직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향리직과 향직은 그 성립연원이 다르고 직과 위계(位階)라는 성격의 차이로 보아 일치시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향직을 향리의 직임이라는 뜻으로 쓸 때에는 그 의미가 상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산계제의 성립 이후에는 향직이 향계(鄕階), 즉 지방의 위계제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건국 초에는 신라의 위계제(位階制)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919년(태조2)부터 태봉(泰封)의 관계제를 받아들였다. 904년 궁예(弓裔)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광평성(廣評省) 등 관부(官府)를 설치할 때 둔 관계(官階)로서 정광 · 원보 · 대상 · 원윤 · 좌윤 · 정조 · 보윤 · 군윤 · 중윤 등 9품계를 설치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후삼국 통일전쟁 과정에서 크게 공헌한 귀순호족이나 고급군관 · 중앙관료 등에게 대광 · 정광 · 대승 · 대상 등의 관계를 주었다. 따라서 이는 고려왕조의 질서체계가 되었으며, 뒤이어 광종대에 있었던 백관(百官)의 공복(公服) 제정이나 976년(경종 1)의 전시과(田柴科)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출신 공신세력을 숙청한 후 문(文) · 무(武)의 중앙관리만을 대상으로 중국식 문산계제(文散階制)를 시행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태조 이래로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기존의 관계는 향직으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향직은 종래의 관계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그 성격을 유지하면서 995년(성종 14) 향직체제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향직은 13세기까지 약 300년간 존속되었으며 최전성기는 11세기를 전후로 한 100여 년간으로 보인다.
향직체제는 중앙관직 이외의 제세력에게 주어지는 품계가 되었으며, 이는 양반관직이나 향리직과 같은 구체적인 관직을 의미하는 실직체제가 아니라 계층적 품계로서 고려 고유의 사회질서를 체계화한 보편적인 신분질서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