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때 술이 취해 간언하는 이염(李恬)을 대호군 김정경(金鼎卿)과 함께 붙잡아 물리쳤다.
1392년(공양왕 4) 6월 조선이 개국할 때 이성계의 반대파로 몰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탄핵을 받아 전판삼사사(前判三司事) 우현보(禹玄寶), 종실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 등 20여 명과 함께 유배되었다.
뒤에 기용되어 1398년(태조 7)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넷째아들인 이방간(李芳幹)의 처의 아버지라 하여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유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