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685m.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 동쪽을 관동지방이라고 한다. 서울과 관북지방 사이, 회양과 고산, 안변을 연결하는 교통·군사상의 중요한 고개였다. 고산은 고개 북쪽, 회양은 고개 남쪽에 발달한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1914년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을 따라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이용 빈도가 감소하였다. 철령에는 지금도 석성(石城)터가 남아 있고 부근에 고음폭포(鼓音瀑布) ·취적5경(吹笛五景) 등이 있다. 서쪽의 풍류산(風流山)과 동쪽의 장수봉(將帥峰)이 천하의 난관을 이루며 북한강과 안변 남대천(安邊南大川)의 수원이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 땅이라 하며 요동(遼東) 관할하에 두겠다고 통보해오자, 고려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철령뿐만 아니라 그 이북의 공산령(公山嶺)까지도 본래는 고려의 영토라 하여 요동정벌을 결의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의 땅도 명나라에 귀속되지 않았다. 이항복(李恒福)은 철령을 소재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긴 바 있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우다가/임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