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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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5세기 중원 북계를 비롯한 산둥반도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 식신 · 직신.
이칭
이칭
식신(息愼), 직신(稷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숙신은 기원전 6~5세기 중원 북계를 비롯한 산둥반도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이다. 식신(息愼)·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조선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으로도 보기도 한다. 숙신의 후손으로는 한(漢)대의 읍루(?婁), 후위(後魏)대의 물길(勿吉)과 수·당대의 말갈(靺鞨), 발해 멸망 후의 여진(女眞)이 꼽힌다. 부여에 살던 읍루족의 후손인 물길이 부여를 멸망시키고 농안지역에 이주한 물길-말갈계 집단이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를 건국하는 주요 세력이 된다.

목차
정의
기원전 6∼5세기 중원 북계를 비롯한 산둥반도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 식신 · 직신.
개설

중국의 고전인 『국어(國語)』 · 『좌씨전(左氏傳)』 · 『일주서(逸周書)』 · 『사기(史記)』 · 『회남자(淮南子)』 · 『산해경(山海經)』 등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식신(息愼) · 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으로도 보기도 한다.

내용

초기 기록인 『국어』에 나온 바에 따르면, 숙신은 당나라 때의 『진서(晋書)』에 언급된 것처럼 흑룡강(黑龍江) 중 · 하류의 주민이 아니었다. 즉,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중원(中原) 북쪽 경계를 비롯해 산둥반도 및 남만주 주민을 총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숙신의 후손으로는 한(漢)대의 읍루(挹婁), 후위(後魏)대의 물길(勿吉)과 수 · 당대의 말갈(靺鞨), 발해 멸망 후의 여진(女眞)이다. 따라서 숙신은 일반적으로 여진족의 선조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체로 그들의 종족 계통과 기원, 분포지역, 읍루 및 예맥(濊貊) · 고조선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는데 고아시아족 기원설과 순퉁구스, 몽고족, 동이(東夷)의 은인(殷人)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최남선(崔南善) · 신채호(申采浩) · 정인보(鄭寅普) 등은 숙신을 조선과 같은 어원으로 생각해 그들의 기원을 백두산 부근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반해 슈미트나 시라코고로프 등과 같이 고아시아족설(古亞細亞族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발상지와 거주지로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 북단을 거론하였다. 또한, 숙신이 중원 북쪽 경계로부터 흑룡강 중 · 하류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을 하북계(河北界), 산둥반도, 발해만(渤海灣) 양안(兩岸), 황하(黃河) 유역의 중원지구 등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숙신의 발상지는 오히려 중원 북계 및 요서(遼西) · 요동(遼東)과 같이 대개 고조선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흑룡강 중 · 하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말∼7세기 초의 춘추시대(春秋時代)를 기록한 문헌에는 중국 동북부에 활약한 종족으로 산융 · 영지 · 고죽 · 도하 등이 등장할 뿐 숙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 이전 숙신이 북경 동북 지방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기원전 8∼7세기 이후에는 길림성 북쪽 일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발음과 명칭상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고조선과 동일 실체로 보기는 어렵다.

변천

숙신의 후신인 읍루족은 부여(夫餘)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읍락 별로 공납을 납부했는데, 3세기 초에 가혹한 징수에 저항해 이탈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목단강(牧丹江) 중 · 하류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의 후신인 물길이 5세기 종반에 발흥하여 동류 송화강(松花江) 유역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북경(北境) 및 농안의 부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물길-말갈계 집단이 농안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들어와 거주하다가 6세기 말 고구려의 북진에 의해 일부는 수나라의 요서지방으로 망명하고, 일부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들 말갈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된다.

참고문헌

『일주서(逸周書)』
『죽서기년(竹書紀年)』
『국어(國語)』
『산해경(山海經)』
『진서(晋書)』
「초기 고조선의 위치와 사회 성격」(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원류와 부여계(扶餘系) 집단 문제」(송기호,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숙신·읍루연구(肅愼·挹婁硏究)」(한규철, 『백산학보(白山學報)』35, 1988)
『고조선연구』(리지린, 학우서방, 1964)
「고조선(古朝鮮)의 대간(大幹)」(정인보,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상(上), 서울신문사, 1946)
「계고차존(稽古箚存)」(최남선, 『청춘(靑春)』14, 1918)
『肅愼挹婁合考』(楊保隆,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9)
「肅愼的地理及其同挹婁的關係」(薛虹, 『吉林師大學報』1980-2, 1980)
「肅愼與挹婁之商榷」(李學智, 『大陸雜誌』14-6, 1957)
「夷夏東西說」(傅斯年, 『慶祝蔡元培先生六十五歲論文集』, 1933)
「肅愼考」(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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