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릉 ()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 태조의 4대조 목조의 비 효공왕후 평창이씨의 능.
이칭
이칭
덕안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효공왕후|목조
소재지
함경남도 신흥군
내용 요약

안릉(安陵)은 조선 태조의 4대조 목조의 비 효공왕후 평창이씨의 능이다. 목조 덕릉과 쌍릉으로 조영되어 있어서 덕안릉이라고도 한다. 안릉은 경흥부성 남쪽 덕릉과 4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1410년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였고, 쌍릉으로 조성하면서 왕릉에 준해 돌거리를 갖추었다. 안릉은 현재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사(加平社)에 자리한다.

정의
조선 태조의 4대조 목조의 비 효공왕후 평창이씨의 능.
건립경위

효공왕후(孝恭王后) 평창이씨(平昌李氏, ?~?)는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의 4대조 목조(穆祖) 즉 이안사(李安社, ?~1274)의 비(妃)로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효비(孝妃)로 추존하고, 안릉으로 추봉하였다.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가 아들이다.

안릉은 처음에는 경흥부성(慶興府城) 남쪽에 있었으며, 덕릉(德陵)과는 4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1410년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현재 장소로 천릉하였다. 덕릉과 안릉을 천릉하면서 쌍릉과 합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주자(朱子)의 ‘혈(穴)은 같이하고 곽은 각각 쓴다는 설(設)’을 모방해 동원이영(同原異塋)으로 조영하였다. 그래서 안릉은 동편, 덕릉은 서편에 있다.

변천

1411년에는 안릉과 덕릉에 표석과 주1을 지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인 관리를 하였다. 1901년에는 고종(高宗)이 어필(御筆) 표석을 세웠으며, 안릉과 덕릉뿐만 아니라 지릉(智陵), 숙릉(淑陵), 의릉(義陵), 순릉(純陵), 정릉(定陵), 화릉(和陵)에도 표석을 건립하고 1906년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형태와 특징

안릉과 덕릉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계에는 한 주2 안에 덕릉과 안릉의 봉분이 각각 주3을 두르고 있고, 각 봉분 앞에 주4이 있다. 각 봉분 주변에는 주5, 주6을 각기 두 쌍씩 배치하였다.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 주7 두 쌍, 하계에는 주8 두 쌍과 주9 네 쌍이 배치되어 있다.

덕릉과 안릉의 주10은 능 아래 70보 거리에 있으며, 정자각 주변에 수라청(水刺廳)과 주11가 있다. 주12은 정자각 동쪽 170보, 비석은 정자각 동쪽 160보, 재실은 홍살문 동쪽 210보에 있다.

금석문

1906년 건립된 비각 안에는 덕릉과 안릉 표석 총 4기가 있다. 1410년에 건립된 덕릉 표석은 앞면에 ‘효비안릉(孝妃安陵)’, 뒷면에 ‘영락팔년시월일립(永樂八年十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1901년에 건립된 고종 어필 표석에는 앞면에 ‘대한효공왕후안릉(大韓孝恭王后安陵)’이라는 전서(篆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주13가 있다.

의의 및 평가

안릉은 조선 전기 추존왕릉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합장릉은 하나의 능호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덕릉과 안릉은 천릉해 쌍릉으로 조영했지만, 각각의 능호를 유지하였다. 또 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에 인석(引石)과 난간석(欄干石)이 없는 것이나, 주14이 설치되지 않은 점, 석마가 하계에 모여 있는 점 등 15세기 왕릉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원전

『북로능전지(北路陵殿志)』
『춘관통고(春官通考)』
주석
주1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2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9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0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1

제사를 마치고 헌관(獻官)과 집례(執禮)가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파묻는 것을 지켜보던 자리.    우리말샘

주12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3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14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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