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145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457년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정순왕후도 함께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는 평생 단종을 기리며 살았는데 나이가 많이 들어 봉양이 필요했으나 혈육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유일한 조카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1456~1512)의 집에 의탁하였다. 이에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정미수의 해주정씨 선산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되고, 각 묘소는 1699년 봉릉(封陵)이 완료되어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왕릉 내에는 민간의 묘가 있을 수 없기에 해주정씨는 선산을 옮겨야 할 상황이었지만, 숙종(肅宗, 재위 1661~1720)은 해주정씨의 의리를 생각해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현재 사릉 서쪽 언덕에 정미수 일가의 묘소가 보존되고 있다.
사릉 봉릉 시 석물(石物)의 체제는 후릉(厚陵)을 따르고, 수(數)는 경릉(敬陵)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 말을 사릉 석물과 비교해 보면 석물의 종류는 경릉, 크기는 후릉을 따랐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릉은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이 없는 단릉(單陵)으로 주변에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으로 망주석(望柱石),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석인(文石人)과 석마(石馬)가 건립되었다.
일반적인 왕릉에 비해 양석, 호석의 수량이 절반이며, 무석인(武石人)이 설치되지 않은 것은 세자묘(世子墓)로 조성된 경릉을 따랐기 때문이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이 건립되어 있다.
비각 내에 있는 사릉 표석은 1771년에 건립되었다. 『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사릉에는 ‘노산군부인 송씨지묘(魯山君夫人 宋氏之墓)’라고 하는 옛 비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사릉은 숙종의 왕릉 석물 간소화 정책이 시작된 중요한 곳으로, 석물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석재의 채취, 운반, 조각 등 제반의 인력과 물자가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사릉 석물 채석장 터〔思陵石物採石場址〕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서 연구 가치가 높다. 사적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