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4년에 건립된 후릉 표석(表石)에는 "조선국 정종대왕 후릉 정안왕후부좌(朝鮮國 正宗大王 厚陵 定安王后祔左)"라고 새겨져 있어서 정종이 오른쪽, 정안왕후가 왼쪽에 안장되었다고 보았다. 『 세종실록』에는 정종(순효대왕)의 석실 및 석물(石物)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17세기와 18세기에 실측한 석물의 크기와 큰 차이가 있어서 태종 헌릉(獻陵) 석물의 치수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후릉 석물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작은 작품인데, 이는 1667년 후릉 석물을 수리하면서 알려졌다. 1698년 단종 장릉(莊陵)과 정순왕후 사릉(思陵), 1701년 인현왕후 명릉(明陵) 등을 조성할 때 이 후릉의 척수를 적용하였다. 후릉 석물 치수 적용은 숙종이 지시한 것으로 정종이 검소하였기에 후릉 석물이 작다고 하였다.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조성되었으며, 상계에는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두른 봉분과 양석(羊石), 호석(虎石), 곡담, 혼유석과 망주석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석인(文石人), 석마(石馬),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건립되어 있다. 후릉 석물은 조선 전기 쌍릉의 체제를 따라 석상 2좌, 석인상 각각 2쌍, 석마 4쌍 등이 제작되어 있다.
『 춘관통고』에는 후릉에 정자각, 수라청(水刺廳), 망료위(望燎位), 표석, 홍살문, 전사청,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재실, 연못 등의 시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표석만 남아 있다.
후릉 석물은 조선왕릉 중 가장 작은 작품으로 숙종은 이것을 정종의 검소함으로 인식하고 왕릉 석물 간소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단종 장릉, 정순왕후 사릉, 인현왕후 명릉 등이 후릉 석물의 크기를 따르고, 다시 사릉과 명릉 등이 다른 석물에 영향을 미쳐 18세기 왕릉 석물의 규모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